편집증 시대의 연애(40)
사방이 어두워질 때쯤 여수에 도착했다. 제비꽃이 예약한 호텔 주차장에 차를 댔다.
"좋은 호텔 찾아봤는데 이 근처엔 없더라. 다 비슷비슷해."
그러게. 오는 길에 호텔을 여러 개 봤는데 간판만 호텔이지 다 모텔 같았다. 제비꽃이 예약한 곳이 그나마 깨끗해 보였다. 우리는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더 늦기 전에 밥 먹으러 가야겠는데?"
"그러자. 더 늦으면 음식점들 문 닫을 거 같아."
우리는 호텔을 나와 근처 간장게장 집으로 갔다. 근처라 그냥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이름난 맛집이었다. 이름은 꽃돌게장 1번가. 밥을 각자 두 그릇씩 클리어한 제비꽃과 나는 배를 두드리며 나왔다. 긴 하루를 보내며 지친 심신이 리프레시되었다.
"제비꽃, 우리 바다 보러 갈까? 바다 앞에 낭만포차 거리가 유명하던데."
"그래 가보자."
우리는 택시를 타고 낭만포차 거리로 향했다. 막상 가보면 별거 없다고들 했지만, 그래도 안 가볼 수 있나. 버스커버스커가 노래한 여수밤바다인데. 우리는 택시를 타고 여수밤바다로 향했다.
여수 낭만포차 거리는 내가 좋아하는 야시장 분위기였다. 포장마차들이 귀여운 전구를 반짝반짝 밝히고선 음식과 술을 팔고 있었다. 야외에서 술 마시는 거 제일 좋아하는데. 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포차를 골라 들어가기로 했다. 어디를 들어가볼까.
그런데 두어 바퀴 돌아봐도 딱 이거다 싶은 포차가 없었다. 멀리서 봤을 땐 다 좋아 보였는데, 내부를 들여다 보고 메뉴와 가격표를 보니 딱히 들어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분위기만 좋지 내실이 별로 없어 보였다.
"류미, 마음에 드는 데가 없구나. 맞지?"
"응. 어떻게 알았어?"
"표정 보면 알지."
"안주 없이 시원한 맥주만 한 잔 하고 싶은데, 여기는 음식이 다 헤비해 보여. 우리 다른 데 가서 맥주나 한 잔 할까?"
"그러든가."
낭만포차들을 벗어나 왼쪽으로 바다를 두고 걷기 시작했다. 해무가 육지까지 침범해 길에 안개가 뿌옇게 꼈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바다 풍경도 감상하고, 서로 사진도 찍어줬다. 여름휴가 시즌이라 그런지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이 눈에 띄었다. 제비꽃이 말했다.
"혹시… 생각해 봤어?"
철렁했다. 올 게 왔구나.
"뭘?"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제비꽃이 멈춰 섰다. 나는 계속 걷고 싶었지만 할 수 없이 멈춰 섰다. 뒤돌아 제비꽃을 바라봤다. 제비꽃이 다가와서 내 손을 당기더니 껴안았다.
"류미야, 이제 결혼하자~ 응?"
"..."
"해, 응? 결혼해 이제. 응?"
저번엔 멋있는 척 다 하면서 '부담 갖지 말고 한번 생각해 봐' 이랬으면서, 이젠 조르듯이 말을 하네? 게다가 이렇게 축축하고 사람 많고 무드 없는 거리에서 두번째 프로포즈라니. 낭만이고 뭐고 와장창 깨졌다. 참말로 마음에 안 들었다.
게다가 새로운 나의 계획은 이번 여행을 어영부영 마무리 짓고, 서울로 돌아가 진 대표에게 연락하는 거였다. 되든 안 되든 진 대표를 만나, 그의 마음과 현 상황을 명확히 한 후, 모든 조건을 고려해 결정해야만 했다.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해.“
"왜? 뭐 때문에 그러는데? 내가 부족해?"
그는 오늘 작정한 것 같았다. 대답을 기다리면서 그는 무기인 서글픈 눈을 만들어 보였다. 제발... 그렇게 슬픈 눈 하지 마. 마음이 약해지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직 잘 모르겠어."
"왜 모르겠어? 나에 대해 확신이 안 서?"
"결혼을 꼭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제비꽃은 왜 나랑 결혼하고 싶어?"
제비꽃이 벙찐 표정이 되었다.
"왜 결혼을 하고 싶냐니. 그냥 하고 싶어. 이유가 꼭 있어야 해?"
"응. 왜 나랑 결혼하고 싶은지 궁금해."
"왜긴 왜야. 류미가 지금 내 곁에 있기 때문이지."
"뭐?"
머리가 띵해졌다. 가장 두려워하던 대답이었다. 그저 곁에 있어서라구?
내가 지금 30대 중반을 넘어 후반까지 혼자 남아 있던 이유가 뭔데.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닌가. 나는 꼭 그 사람이어야만 하고, 그 사람은 꼭 나여야만 하는 사람을 원했다. 그냥 옆에 있는,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과 결혼할 거라면 내가 지금까지 결혼을 10번은 했어야 했다. 그런데 뭐? 결혼하려는 이유가 단순히 옆에 있어서라고?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나 아니고 다른 사람이면 제비꽃은 그 사람이랑 결혼했겠네?“
"무슨 말이야 그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류미잖아. 그런 가정은 성립이 안돼."
"어쨌든 내가 아니어도 누구랑 결혼해도 상관없다는 말이잖아."
"상관없다니. 류미니까 결혼하겠다는 거잖아."
"류미라서가 아니라 옆에 있어서 결혼하는 거라며."
"아니 옆에 있는 사람이 류미니까 결혼한다는 말이잖아."
"그건 말장난이고! 그러니까 왜 나랑 결혼하고 싶냐고. 그 이유 말고 없어?"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지금껏 나의 진가를 알아주고, 꼭 나 같은 사람 - 나의 쿨함, 취향, 외모, 유머 감각, 성격, 꽁꽁 숨겨놓아 심지어 가족과 친구들도 모를 (이 정도면 없는 거나 다름없나?) 내면의 매력 등 - 을 찾아 헤맨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를 애타게 찾아왔던 사람을 만나 해피엔딩을 맞고 싶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어떤 여자여도 덥석 붙잡았을 한 아저씨가 결혼을 하자고 덤비고 있었다.
제비꽃도 덩달아 언성을 높였다.
"널 좋아하니까 결혼하고 싶지! 내가 왜 아무랑이나 결혼을 하고 싶어 하겠어?"
"그럼 내가 왜 좋아? 어떤 이유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거야?"
"나도 몰라."
"내가 왜 좋은지도 모르는데 결혼하자고 하는 게 말이 돼? 아 진짜 답답하네!"
"나도 모른다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몰라 나는! 그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을 좋아하는데, 대체 대한민국을 왜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이유가 있니 너는?"
음? 그건 그렇지. 애국심은 이유가 있어서 생기지는 않지. 그렇다면 제비꽃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나? 조국에 대한 사랑처럼? 흠. 처음 들어보는 비유지만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아주 약간 흡족해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릴 힐끔힐끔 쳐다봤다.
"아아 됐어. 일단 맥주 마시러 가자. 이따 다시 얘기해."
난 제비꽃의 손을 끌고 다시 길을 걸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제비꽃도 답답한 것 같았다. 왜 우린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는데 말이 계속 헛돌까? 서로가 하는 말을 듣긴 하는데, 알아듣는 것 같진 않았다. 만약 내가 그와 결혼을 조금이라도 마음먹게 만들려면 적어도 이렇게 말해야 했다.
'난 평생 류미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맸어. 너의 외모... 너의 쿨함... 너의 까칠하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마음... 너의 똑똑한 머리... 탁월한 유머감각... 예술적인 감성... 인정 많은 성격... 좋은 걸 귀신같이 알아보는 안목... 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너의 반짝이는 눈동자... 너의 매끈한 피부... 임플란트 하나 안 심은 튼튼한 치아... (이하 내 칭찬 500개 나열) 세상에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왜 나는 이제야 류미를 만났을까? 난 류미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을 거야. 누구도 너처럼 완벽하지 않으니까."
요정도는 해야 내가 '음~ 드디어 내 진가를 알아주는 남자군' 하면서 진 대표보다 훨씬 점수를 많이 주고 긍정적으로 고민해보겠지. 그런데 뭐? 고작 옆에 있는 게 나라서? 기가 막혔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 비유도 좀 그래. 솔직히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그래도 대한민국을 고르겠어? 캐나다나 덴마크 같은 거 고르겠지. 대한민국에 태어나 대한민국을 좋아한다는 말은, 이미 선택된 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건 맘에 들지 않아. 100개의 선택지가 있고, 그중에서도 콕 찝어 나를 선택하는 사람이어야지.
한참 걷다 보니 넓은 공터가 나왔다. 제비꽃이 입을 열었다.
"류미야, 여기 둘러보고 가자."
"여기가 어딘데?"
"이순신 광장이래."
"응. 근데 나 화장실 가고 싶어."
"그래 다녀와."
둘러보니 광장 한쪽에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가로등이 있었지만 좀 으슥했다.
"같이 가면 안돼? 무서워."
당연히 같이 가줄 줄 알았던 제비꽃이 의외의 말을 했다.
"뭐가 무서워. 혼자 다녀와. 나 여기서 사진 찍고 있을래."
그는 이순신 동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여자친구가 이 야심한 밤에 공중화장실을 가는데 걱정은커녕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이나 찍겠다고? 아무리 위대한 이순신 장군이라지만 너무하네.
"참내 알았어! 그렇게 좋으면 이순신 장군이랑 결혼해라!"
툴툴대면서 공중화장실로 향했다. 힐끗 돌아보니 제비꽃은 따라오지 않고 이순신 동상 뒷모습을 찍고 있었다. 아 열받네.
화장실에 들어가니 자동 센서 등이 켜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디선가 변기 물이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었다. 비어 있는 칸을 다 들여다봐도 모두 정상이었다. 남은 건 맨 안쪽 칸. 문이 닫혀 있는 이 칸에서 물이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이상했다. 만약 변기 레버가 고장 나서 물이 계속 내려가는 거라면, 화장실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누군가 볼일을 보고 레버가 고장 난 채로 자리를 떠난 거니까. 그런데 문이 닫혀 있고 물이 계속 내려가는 게 아무래도 불길했다. 혹시 누군가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리다 레버를 붙잡고 쓰러진 건 아닐까? 아니면 누가 봉변을 당했는데 기절하면서 머리통이 레버를 누르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무서운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다니. 내가 뭔가 해야만 했다.
"제비꽃!!"
화장실을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이순신 동상 뒷모습을 찍던 그가 이제는 장군님 앞모습을 찍고 있었다.
"왜 류미야, 무슨 일이야?"
"나 무서워. 안에 어떤 칸에서 물이 내려가는데 문이 닫혀 있어.“
"고장 났나 보네."
"아니 문이 닫혀 있다니까. 생각을 해봐. 누가 볼일 보고 나갔으면 문이 당연히 열려 있어야 하잖아? 근데 닫혀 있어. 닫힌 문 뒤에서 물이 계속 내려가고 있다고."
"글쎄, 별일 아닐 거 같은데."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어? 만약에 누가 쓰러져 있으면 어떡해? 왜 뉴스에도 나오잖아. 혹시나 해서 살펴봤다가 운 좋게 사람을 구한 사례들. 우리가 지금 가면 죽을 뻔한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제비꽃이 한숨을 쉬었다.
"류미, 너는 왜 맨날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만 상상해? 그런 일은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해. 난 네가 이럴 때마다 이해가 안 가."
"뭐가 극단적이야. 그런 일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일어난다구. 항상 이웃에게 관심 갖고 이상하면 살펴보고 신고하는 행동이 제비꽃이 그렇게 ‘사랑하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 아닐까?"
단숨에 몰아쳐서 다다다다 말했다.
"알았어... 휴. 가서 보자."
그가 한숨을 쉬더니 여자 화장실 앞으로 걸어갔다. 입구 문을 연 제비꽃이 멈춰 섰다.
"나 여기까지밖에 못 들어가."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아. 빨리 가서 보고 오자."
주저하는 제비꽃의 손을 이끌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맨 마지막 칸 변기물이 여전히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밀리지 않았다.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이거 봐! 어떡해. 잠겨 있어. 안에 사람 있나 봐."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서 제비꽃의 손을 꼭 잡고 쭈그려 앉았다. 고개를 바닥에 가깝게 기울여 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누군가가 바닥에 쓰러져 있을 것 같았다.
"헉."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더 밑으로 숙여 뺨이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 변기 위까지 보였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뭐가 헉이야. 아무것도 없지?"
"응."
"빨리 나가자."
우리는 화장실을 나왔다.
"거 봐.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어."
"그래, 보통은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늘 만의 하나 때문에 사람이 죽고 사는 거야. 그리고 여전히 이상해. 아무도 없는데 물은 내려가고 있고 문은 잠겨 있다고.“
"으휴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우기긴. 류미야, 누구나 그렇게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살지 않아. 물론 그 때문에 사람을 살리는 일도 있겠지. 하지만 너무 그런 생각만 하고 사는 건 좋지 않아. 오히려 그런 생각 때문에 그런 일이 더 많이 닥치는 게 아닐까? 가만 보면 류미는 특별함에 대한 선망이 있는 것 같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뜨끔했다. 사실이었다. 나는 늘 특별한 상황을 가정했다. 이번 화장실 사례는 '특별히 안 좋은 상황'으로 분류되었다. 난 작은 불안이라도 있으면 기어이 확인하거나 제거해야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고 불안이 없어지나? 아니다. 불안이 또 다른 불안을 불렀다. 불안을 아무리 제거해도 또 다른 불안이 생겨난다는 걸 알아도 멈출 수가 없었다.
제비꽃과 진 대표 사이에서 하는 고민도 비슷하지 않을까? 제비꽃과 진 대표와 함께했을 때 내가 겪을 특별히 안 좋은 점과 특별히 좋은 점을 계속 견주고 있으니. 사실 뉴스에 나올 만한 일들은 살면서 손에 꼽을 만큼 겪을텐데 말이다.
피로했다.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