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불행을 피하고 싶어. 그게 아주 작은 것이라도.

편집증 시대의 연애(41)

by 류미

사천으로 떠나는 날. 오전부터 비가 퍼부었다.


어느덧 여행도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사천에서 하루, 통영에서 하루를 보내면 여름휴가는 끝이었다. 문득, 제주에서의 시간이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진 대표와 꽁냥대던 나날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하긴, 실제로 우리가 만난 건 2주고(그마저도 평범한 저녁 식사) 나머지 일주일은 서로 말도 안 했으니.


20년 후 이때를 돌아보면 진 대표와의 시간은 어떻게 기억될까? 평생 인연을 만난 귀한 여름? 상대의 가벼운 감정에 혼자 깊이 착각한 한여름의 (개)꿈?


우리는 사천 호텔에 도착했다. 시간은 늦은 오후였고, 퍼붓던 비가 거의 그쳐 있었다. 방에 짐을 풀고 이른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호텔 직원이 추천해준 장어구이집은 1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걷다 보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비닐 우산을 하나 사서 함께 썼다. 여름의 산뜻한 냄새와 비를 머금은 흙내음이 기분 좋았다. 이번 여행에서 해를 본 적이 손에 꼽았다. 장마와 함께하는 여름휴가라.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기억에 남길 만한 결말이 난다면 말이지.


장어구이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장어 굽는 고소한 냄새가 풀풀 났다. 우리는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응 천천히 다녀와."


제비꽃이 일어난 자리에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검은 화면을 보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예술의전당 앞에서 싸우던 그날, 시발점은 그의 핸드폰이었다. 카톡으로 친구랑 여자 얼평하는 짓을 저질렀는데, 그날 싸우다 제비꽃이 우는 바람에 유야무야 넘어가고 말았다.


그의 핸드폰을 끌어다가 훔쳐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저 검은 화면 안에 감춰진 이야기는 뭘까? 핸드폰이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보였다.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친구랑 여자 얼평을 하고 있진 않을까? 혹은 지인들에게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고 있으려나?


제비꽃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르면 어쩌지? 나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런 면은 쉬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인터넷에는 그런 사례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착한 남친인 줄 알았는데 단톡방에서는 여친에 대해 음담패설을 늘어놓거나, 지인에게 '여자친구를 사랑하지 않는데 마지못해 사귀고 있다'고 내밀한 속내를 털어놓는 등등. 그리고 우연히 남편 차 블랙박스를 확인했는데, 자신과 다정하게 통화를 끊은 후 "XX년 처먹고 싶은 게 뭐가 그리 많냐 X발 짜증나" 이렇게 말한 사례도 보지 않았는가?


작정하고 숨기면 절대 모른다.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훔쳐보는 것이다. 나는 제비꽃의 핸드폰을 노려봤다. 저 핸드폰에 손을 뻗을 것인가? 판도라의 상자를 내 손으로 열 것인가?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그를 선택할 것인지 말지 결정할 것인가?


그때, 제비꽃이 돌아왔다.


"와 여기 푸짐하게 준다. 맛있겠다."


실로 그러했다. 석쇠에 올라간 통통한 장어가 맛있게 구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저조해져 있었다. 제비꽃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류미, 그새 무슨 일 있었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무슨 일은 없었다. 그의 핸드폰을 쳐다본 후 기분이 달라졌을 뿐.


"아냐. 먹자."


나는 노릇노릇 구워진 장어를 한 조각 집에 소스에 찍어 입에 넣었다. 음? 존맛. 기분은 저조했지만 혓바닥은 제노릇을 하고 있었다. 제비꽃이 상추와 깻잎을 포개고 장어와 갖가지 채소를 얹어 쌈을 싸서 얼굴앞에 들이댔다. 나는 입을 벌려 쌈을 우적우적 씹었다.


그는 이런 음식을 먹을 때면 늘 자신이 먹기 전에 내게 쌈을 싸주었다. 삼겹살, 회, 꼼장어, 과메기, 닭갈비... 나는 그의 이런 면을 좋아했다. 하지만 만약 결혼하고서 이런 면이 변하면 어떡하지?


"제비꽃, 쌈 싸주는 거 언제까지 할 거야?"


"언제까지 할 거냐니?"


"결혼하면 혹시 안 싸주는 거 아냐? 결혼하고 변하는 남자 최악인데."


제비꽃의 얼굴에 잠시 피곤한 표정이 나타났다. 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 표정은 뭐야?"


"아냐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냐. 피곤하다는 표정 지었잖아."


"흠... 류미야. 내가 까먹고 쌈을 안 싸주는 날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류미에 대한 마음이 변하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이 왜 안돼. 나는 결혼하고 변하는 사람은 싫단 말야."


"일단 먹자. 장어가 지금 타고 있어."


나는 불만스러웠다. 그냥 '언제까지나 쌈을 싸줄게~' 이렇게 말하면 되잖아. 나는 속으로 궁시렁대며 말없이 장어만 입에 넣었다. 중간중간 소주를 원샷했다. 술이 들어갈수록 더 불안해졌다. 만약에 내가 제비꽃을 선택해서 결혼했는데 여자들을 얼평하거나, 친구들에게 나에 대해 낮게 말을 하거나, 나 없는 데서 내게 쌍욕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떡하지?


실체 없는 불안이 나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제비꽃, 지난번에는 어찌어찌 넘어갔는데... 혹시 요새도 친구랑 카톡으로 여자들 얼평해?"


"또 그 얘기야?"


"아니... 그게 얼마나 나쁜 일인지 제비꽃이 확실히 알았나 궁금해서."


"그만해. 여행 와서까지 그 얘기할 필요 없잖아."


"아니, 그래서 여자들 얼평하냐구."


나는 제비꽃을 쳐다봤다. 눈이 취기에 풀린 게 느껴졌다. 나는 취해서, 평소보다 한 세 배는 화가 나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부릅떴다.


"그만해. 넌 진짜 나를 못 믿는구나."


"말해."


"싫어."


"말하라니까."


제비꽃이 대답하는 대신 술만 연거푸 마셨다. 나는 씩씩대며 그를 노려봤다.


"내가 말했지? 그거 범죄라고.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래 신고하라니까. 해!"


나는 그를 노려보며 씩씩댔다. 감히 나한테 신경질을 내? 제비꽃이 술잔을 집어서 소주를 원샷했다.


"갈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전 남친들에게 자주 하던 '식당에서 상대방이 앉아 있는데 자리 뜨기'를 제비꽃에겐 처음으로 시전한 것이다. 다행히 밖엔 비가 거의 그쳐 있었다.


나도 안다. 이런 행동은 유치할 뿐 아니라 상황을 악화시킨다는 것을. 하지만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마냥 불안했다. 내가 하는 선택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까 봐 무서웠다.


나는 세상의 모든 불행을 피하고 싶었다. 결혼 전에는 쌈을 싸주다가 결혼하고는 싸주지 않는 것 같은, 아주 작은 불행이라도.


나는 골목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한참 지나자 다시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야 하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도, 메시지도 와 있지 않았다. 나를... 안 찾나?


술이 깨면서 아까 행동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여자 얼평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면 살살 달래서 기회를 봐서 말했어야 했는데, 너무 대놓고 말했다. 나는 큰길 쪽으로 발을 옮겼다. 어떤 방식으로 숙소로 돌아가야 자존심이 덜 상할까 고민했다.


그때, 멀리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제비꽃의 모습이 보였다. 한 손으로는 우산을 쓰고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다. 숙소 들어가서 우산 들고 왔나 보네. 내 쪽은 안 쳐다보겠지? 그런데 제비꽃이 내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나는 깜짝 놀라 트럭 뒤에 주저앉았다. 봤나?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고 빼꼼 올려다 보니 그가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못 본 것 같긴 한데... 나는 트럭 뒤 보도 턱에 앉아 그가 가길 기다렸다. 그런데 저쪽에서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던 할머니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이씨. 수상해 보였나? 나는 트럭에서 살짝 빠져나와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조금 올라가다 뒤를 보니, 제비꽃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왼쪽으로 꺾어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곧 달리기 시작했다. 골목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돌고, 갈림길에서 또 오른쪽으로 돌았다. 뛰다 보니 은근히 재밌었다. 마치 영화에서 경찰에 쫓기는 건달 같았다. 뛰면서 웃음이 나왔다. 지금 나이 먹고 뭐 하는 짓이니?


앞에 있는 담벼락을 따라 오른쪽으로 돈 순간, 막다른 길이 나왔다. 안 되는데. 뒤로 돌아서 뛰는데 옆 골목에서 갑자기 제비꽃이 튀어나왔다.


"꺄악!"


"조용히 해."


그가 내 손을 끌고 골목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미 역할극에 취해 있던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재밌었다. 나는 온몸으로 반항하며 소리 질렀다.


"살려주세요! 꺄악 살려주세요!"


제비꽃이 한 손으로 내 입을 막고 신경질 난 표정으로 나를 골목 밖으로 끌어냈다. 많이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금방 큰길이 나왔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밀고 몸부림을 쳤다.


그 순간, 어떤 아저씨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겨드랑이에 우산을 끼고 손으로는 내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는 우산을 펼쳐 들고 내 목을 두른 제비꽃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안 되겠다. 더 이상 하면 제비꽃 경찰서 가겠구나.


나는 몸부림을 멈추고 그와 얌전히 내려갔다. 아저씨는 별 미친것들 다 있다는 듯 쳐다보더니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류미 넌 진짜... 좀 이상한 애 같아."


"이제 알았어?"


"너를 어떻게 해야 되겠니 진짜..."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비를 맞으니 몸이 으슬으슬했는데,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침대에 누우니 세상 포근하고 좋았다. 저녁도 먹었겠다, 이제 뭐 하지?


"류미야, 호텔 뒷문 앞에 슈퍼 있던데 거기 갈래? 간단한 안주 파는 거 같더라. 술 마실 수 있는 평상도 있고."


"그래, 가지 뭐."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간이 슈퍼에서 쥐포와 한치, 그리고 칭따오 큰 병을 사서 평상에 앉았다. 아직 비가 내리고는 있었지만 많이 잦아들어 있었다.


"아까 나 어떻게 찾았어?"


"호텔로 간 줄 알고 가보니까 없더라고. 우산 하나 더 들고 나와서 여기저기 찾아다녔지."


"정말? 정말로 나 찾아다녔어?"


"그래."


"근데 아까 트럭 뒤로 숨었는데 그거 봤어?"


"웃긴 게... 분명히 사람이 없는데 잔상 같은 걸 본 느낌인 거야. 그 왜 만화 보면 뿌옇게 잔상 표현하잖아. 딱 그런 느낌이었어."


"크크큭 진짜? 잔상이 남는구나 실제로."


"어. 짜증나는 와중에도 웃기더라고.“


제비꽃이 힘 빠지는 웃음을 지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나도 잔을 들어 짠 부딪혔다. 시원하고 맛있는 맥주였다.


"여기 슈퍼 허름하고 쥐포도 대충 구워서 비린내 나는데... 왠지 좋다. 나 노천에서 술 먹는 거 제일 좋아하거든. 여수 낭만포차보다 여기가 훨씬 좋다."


"다행이네. 류미가 좋다면 나도 좋아."


"응. 비오는 여름밤에 이렇게 야외에서 맥주 한잔 할 수 있다면 뭐가 부러울까 싶기도 하고."


기분에 취해서 그랬을까? 여름밤 노천 맥주만으로도 인생이 충분히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은 진심이었다. 더 잘 살아보려고, 더 좋은 남자 만나려고, 온갖 불행을 다 피하려 발버둥 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40년 가까이 단단히 지키고 있던 철옹성 같은 내 철벽이 조금씩 금이 가는 듯한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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