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42)
마지막 여행지, 통영이었다. 마지막 날이니 무리하지 않고 동피랑 마을만 후딱 둘러보기로 했다. 이제 비는 그치고 불볕 더위가 시작되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가파른 동피랑 마을에 올라갔다. 담벼락에 그려진 예쁜 그림 앞에서 사진도 찍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참 예쁜 마을이지만, 30대 중반과 후반의 커플에게 무더위에 경사로는 쥐약이었다. 우리에겐 그늘과 시원한 음료가 절실했다. 거의 꼭대기에 다다라 작은 카페가 보였다. 우리는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커피 두 잔을 시켰다.
"크아 진짜 시원하다."
"와 살 거 같애."
둘 다 탄성을 지르며 단숨에 반을 마셨다. 시원한 걸 들이키니 심신이 안정되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창밖에 펼쳐진 멋진 뷰를 감상했다. 통영은 아름다웠다. 주차가 헬 오브 헬이었지만 우리의 베스트 여행지에 들 만했다. 마지막 날을 통영에서 보내기로 한 건 잘한 결정이었다.
카페에서 한참 놀다 내려와 늦은 점심으로 충무김밥을 먹었다. 통영이 충무김밥의 발상지인가 싶을 정도로 충무김밥 집이 많았다. 서울에서라면 가성비 최악으로 소문난 충무김밥 집에 갈 리 만무했지만, 여행을 왔으니 옛다 기분이다 일단 먹는 거야.
확실히 충무김밥은 양이 적었다.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여러 번 추가 주문해서 양껏 먹었다. 여행의 좋은 점이 이거다. 가성비를 상대적으로 덜 따지게 된다. 충무김밥을 가산을 탕진해가며 원 없이 먹는 날은 다시없을 것이다.
조금 더 돌아다니다가 숙소로 일찍 귀가하기로 했다. 너무 더워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사실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영이니, 그리고 마지막 날이니 회를 먹어야 했다.
통영활어시장으로 향했다. 아주머니들이 바닥에 앉아 회를 팔고 있었다. 여느 관광지처럼 호객행위를 하며 귀찮게 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입구에서 맨 끝까지 금방이었다. 우리는 끄트머리에 앉아 계신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광어랑 우럭 회 얼마예요?"
아주머니가 광어와 우럭을 휙휙 건져 바구니에 담았다.
"이렇게 3만 원."
"와 이만큼이 3만 원이에요? 진짜 싸다."
"우린 비싸게 안 받아. 이건 덤."
아주머니가 자잘한 해산물을 더 얹어주셨다.
"고맙습니다. 여기 3만 원 현금 드릴게요."
우리는 회 봉지를 들고 회 떠주는 곳으로 갔다. 회 뜨는 비용도 저렴했다. 통영이 인기 관광지가 된 지 꽤 됐는데도 이런 가격이라니, 기분이 매우매우 들떴다. 숙소에 들어와 테이블에 회 한 접시와 각종 쌈 채소, 초고추장과 간장, 참이슬과 카스, 맥주잔 2잔, 소주잔 2잔을 세팅했다.
우리는 여름휴가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며 소주 한 잔, 소맥 두 잔, 회 한 점, 쌈 하나, 멍게 한 조각... 맛있게 흡입했다. 회가 양이 많아서 남은 건 매운탕에 넣어 먹어야 할 판이었다.
"이제 매운탕 먹을까?"
"그래 좋아.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나는 알딸딸하게 좋은 기분으로 화장실에 갔다. 변기에 앉아 오줌을 누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즐거운 여름휴가였다.'
매일 자잘하게 싸우긴 했지만 그거야 원래 일상이고, 그래도 이렇게 나만 바라보고 챙겨주는 사람인 걸 확인했다는 성과가 있는 여행이었다.
진 대표는... 일주일 새 더욱더 멀어져 있었다. 사실 나처럼 불안한 거 싫어하는 사람에게 진 대표는 현실적이지 못한 옵션인 듯했다. 물론 결혼을 생각 안 하면 문제가 없다. 젊은 스타트업 대표라는 직위, 젊은 나이, 키 크고 잘생긴 외모, 패션 센스 및 기타 성격적인 장점들. 그에겐 내 어깨를 쭉쭉 올려줄 키워드가 많았다.
그러나 결혼할 사람이라면 그런 특별히 좋은 면보다, 불안정한 요소를 제거하는 게 낫다는 결론이었다. 제비꽃은 특별히 멋진 점이 거의 없었지만 날 불안하게 하는 요소 또한 그다지 없었다. 물론 그의 장점이 '나만 바라보는 순애보'에 몰빵 되어 위험성이 있긴 했지만, 삶을 살 때 불안해할 요소는 훨씬 적었다.
까놓고 말해 진 대표는 주변에 여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걱정될 것 같았지만, 제비꽃은 어디에 놔둬도 안심이었다. (제비꽃, 내가 솔직해서 미안해요)
화장실에서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제비꽃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내가 잠시 나간 사이에 핸드폰으로 다른 걸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앉아서 회를 먹기 시작했다. 술도 한 잔 더 먹었다.
그런데, 금방 일어날 줄 알았던 제비꽃이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한테 눈길도 안 주고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뭐야, 여행 와서 뭐 하는 짓이야? 슬쩍 보니 런닝맨이었다. 같이 여행 와서, 게다가 마지막 날인데 혼자 예능을 봐?
화장실에서의 편안하고 고요했던 마음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대화가 지루해졌다면 같이 티비라도 볼 것이지, 지 혼자 런닝맨을 보고 앉아 있어? 아니 누워 있어? 역시 내 착각이었다. 나만 바라보고 매 순간 날 배려할 줄 알았던 사람이, 나를 방치하고 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보며 낄낄대는 제비꽃을 어이없게 쳐다봤다. 결혼 후 남편이 쇼파에서 티비만 봐서 외롭다고 한 여자의 글이 떠올랐다. 내가 원하는 결혼은 그게 아닌데. 결혼 전에 벌써 싹수가 보이는구나. 나는 화난 마음을 억누르며 남은 회를 입에 넣었다. 미지근해진 회는 물컹하고 맛없었다. 소주를 원샷했다. 아 짜증나네. 참아야지 참아야지 참아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역시 말은 생각보다 빨랐다. 나의 화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입으로 튀어나왔다.
"응? 런닝맨 봐."
사태를 파악 못한 제비꽃이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웃긴 장면이 나왔는지 와하하하 웃었다. 튀어나온 화는 곧 거센 분노로 바뀌었다.
"누가 몰라서 물어? 지금 여행 와서 뭐 하는 거냐고."
"뭐가 류미야."
드디어 그가 날 쳐다봤다.
"여행 와서 혼자 핸드폰 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어?"
"류미 화장실 간 동안 잠깐 본 건데 뭐."
"나 화장실에서 돌아온 지 한참 지났어.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핸드폰만 보고 있잖아... 지금!"
"류미야 또 왜 그래. 왜 이렇게 억지 써."
"또? 그리고 뭐? 억지?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해?"
제비꽃이 기분이 상한 듯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발 류미야... 나 좀 잡지 좀 마. 힘들어..."
"여행 마지막 날이면 그간의 회포도 풀고 앞으로의 계획도 얘기하고 그래야 할거 아냐?"
나는 그에게 매 순간 관심을 요구했고, 그가 다른 데 관심을 돌리면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그의 온리 원이어야 했다. 특히 함께 있을 때 그의 모든 관심은 오로지 나, 류미여야 했다. 그래야 그를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그만 좀 해... 제발! 넌 나를 코너에 몰아넣고 숨 막히게 만들어! 그만! 그만! 그만 좀 하라구!"
제비꽃이 소리를 빽 지르고 방을 나갔다. 이어서 작은방 문 닫히는 소리가 쾅하고 들렸다.
'뭐야 지금... 나한테 소리를 지르고 문을 쾅 닫아? 고작 이런 일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음 같아선 쫓아가서 더 싸우고 싶었지만, 나는 다른 마음을 먹었다.
'그래 좋아. 우리 오늘 끝이야. 감히 나를 방치한 것도 모자라서 소리 지르고 다른 방으로 문 쾅 닫고 들어가? 용서 못해. 응 용서 못함.'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이제 결정했다. 그와 헤어지고 서울로 가서 진 대표에게 연락해야지. 아까 화장실에서 진 대표가 멀리 느껴지고 불안하고 어쩌고 했던 거 취소다.
마음이 놀랍도록 고요해졌다. 먹던 음식을 싹 치우고 설거지까지 했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한 후,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모든 걸 할 동안 제비꽃은 작은방에서 꿈쩍도 안 했다. 화장실도 안 가나? 내 알 바 아니지. 이제 정말로 끝이다. 끝내게 해 줘서 고맙다 제비꽃.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 아침 통영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첫차를 검색했다. 버스터미널에서 새벽 6시 출발이었다. 숙소에서 서울 집까지 거의 6시간이 걸렸다. 겁나 머네. 그래도 예매 버튼을 꾹 눌렀다. 이번 여행에서 제비꽃을 식당에 혼자 앉혀두고 자리 뜨기를 처음 시전했는데, 이제 여행지에서 혼자 돌아가기를 시전 할 차례였다. 날 놓친 걸 평생 후회하게 해주겠어.
버스표를 예매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자야 한다. 괜히 늦잠 자면 일이 복잡해진다. 서로 깨어 있는 상태로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원치 않는 화해를 할 수도 있단 말야.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이 참에 완전히 끝내. 차라리 잘 됐어.
눈 감고 끝말잇기를 했다. 잠이 유난히 안 오는 밤이면 이 방식으로 5분 내로 잠들곤 했다.
'통영... 영광... 광기...기차... 차표... 표인봉...아 사람 이름은 안 된다고 정했지. 표정...정류장...장...'
"띠띠띠띠~ 디리릭!"
눈을 번쩍 떴다.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니 한 시가 넘어 있었다. 뭐지? 제비꽃 집 나갔나? 이 새벽에 어딜 가? 혹시 자기 먼저 서울 가려고? 나 버리고?
화들짝 놀라 안방 문을 살짝 열고 거실로 나갔다. 작은방을 보니 방문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귀를 문에 대봤다. 안에서 비닐 부시럭대는 소리가 났다. 아, 나간 게 아니라 나갔다 들어온 거구나. 편의점에서 뭐 사왔나?
나는 살며시 안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저 안에서 뭘 하는 걸까? 혼자 울고 있으려나? 우리 사이가 끝났다는 걸 직감하고 절망해서? 그가 소리를 지르는 일은 흔치 않았다. 하지만 소리를 지른 후에는 꼭 신세한탄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저 방문 뒤로 소주로 병나발을 불며, 눈물 흘리며 벽에 기대 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의 (상상 속) 모습에 마음이 슬퍼졌다. 나를 그에게로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가 나만을 생각하는 모습, 그리고 눈물 흘리는 모습. 내가 좀 심했나? 한숨 자고 일어나니 술이 깨서 그런지 화도 많이 풀려 있었다.
그리고... 서울 집까지 6시간은 부담스러웠다. 일주일 여행이라 짐도 많고 무거웠다. 새벽 5시에 숙소에서 나와 이 짐을 끌고 택시나 버스를 타고 통영버스터미널까지 가서 4시간 넘게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가서 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귀가하는 게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제비꽃 차로 편히 올라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혈기왕성한 20대였다면 분노를 엔진 삼아 기어이 했겠지만, 나는 이제 노쇠하고 힘이 딸렸다. 저렇게 불쌍하게 구는데 대강 화해하고 내일 서울이나 편하게 올라갈까? 다음 일은 돌아가서 생각해 보고.
그렇게 나는 작은방 문 앞에 섰다. 문 뒤에서 울고 있을 그를 달래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