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43)
작은방 문을 살짝 열고 동태를 살폈다. 그가 엎드려 있었다. 울고 있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핸드폰 때문에 그 사달이 났는데 아직도 보고 있구나. 스마트폰 중독자 같으니라구.
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그는 내가 들어온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귀에는 에어팟을 꽂고 있었다. 그가 오른손을 뻗어 과자를 집어 먹었다. 썬칩이었다. 소주는 없었다. 편의점에서 고작 썬칩 한 봉지를 사 왔어? 가까이 다가섰지만 그는 여전히 내가 온 줄 모르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보니 유튜브였다. 재밌는지 낄낄대며 썬칩을 하나 더 집어 먹었다.
나는 저 방에 누워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혼자 낄낄대며 핸드폰을 봐? 나는 니가 깡쏘주 까면서 울고 있을까 걱정돼서 들어온 거란 말야!
어김없이 또 화가 났다. 그의 등을 손으로 탁탁 두드렸다.
"으악!!!!"
그가 기절할 듯 놀라며 뒤돌아봤다.
"헉헉... 깜짝 놀랐잖아. 심장 떨어질 뻔했어... 헉헉."
그가 두 손을 가슴에 얹고 헉헉댔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감은 눈을 한참 동안 뜨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유튜브 보고 있었어."
"아까 그렇게 싸우고도 유튜브를 봐? 이딴 썬칩이나 먹으면서!"
"왜 그래 또 류미야..."
"나는 속상해서 잠도 못 자고 괴로워하고 있는데, 지금 유튜브가 눈에 들어와?"
"나도 힘들었어. 힘들어서 유튜브 켠 거야. 아까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알기나 하니?"
"어떻게 하고 있었는데?"
"됐어. 말하고 싶지 않아."
"어떻게 하고 있었는데. 말해!"
"그만해 좀...! 왜 이렇게 나를 추궁해. 왜!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류미야 제발...!"
그가 고개를 푹 떨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괘씸했다. 어떻게 할까? 더 괴롭히다가 적절한 시점에 화해할까, 아니면 그냥 여기서 눈 딱 감고 용서를 할까? 그러기엔 좀 분한데... 어떤 처분을 하지?
"류미야... 나 서울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그래.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어."
“돌아가서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볼래."
"무슨 말이야?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본다니? 뭘?"
"전부 다."
"전부 다라는 건... 나도 포함이야?"
그가 한참 뜸 들이더니 말했다.
"어 맞아. 우리 관계까지 모두."
가슴이 철렁했다.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본다니? 제비꽃이 나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본다니? 실제로 가능한 일이야? 너무 더워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닐까? 혹시 나 겁주려고 연기하나?
"나 너무 힘들어... 회사도 힘들고 너도 힘들고 다 힘들어. 못 견디겠어. 나 이제 한계야."
얼굴을 감싸 쥔 손가락 사이로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보통 그가 울면 짠한 마음이 드는데, 이번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나오리라곤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카드는 내가 쥐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렇게 믿었으니까. 화를 내도 내가 내고, 헤어지자고 해도 내가 해야 했다. 그런데 그가 날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면, 난 어떻게 될까?'
상상이 안 갔다. 그는 이미 공기처럼 내 삶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전 남친들은 사귀면서도 늘 한 발 떨어져서 관조하며, 메이저한 단점을 찾아 적당한 시기에 헤어지곤 했다. 하지만 제비꽃이랑은 아무리 단점을 많이 발견하고 수십 번 싸워도, 이상하게 헤어질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진 대표와 제비꽃을 저울질하던 순간에도 그가 없는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진 대표를 선택하는 순간, 당연히 제비꽃은 내 삶에서 아웃이다. 그런데도 제비꽃 대신 진 대표만 내 인생에 있는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제비꽃이 내게 이별을 암시하는 말을 하고 나서야 깨닫다니.
"진심이야? 나 겁주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어 진심이야. 류미야... 넌 기준이 너무 높아. 내가 그걸 어떻게 다 만족시키겠어. 항상 좌절감이 들어."
"내가 기준이 뭐가 높아. (내 기준이 그렇게 높았으면 제비꽃 만나지도 않았어!)"
"널 만나는 동안 난 늘 불안했어. 항상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거든. 날 정말 좋아한다면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너... 날 정말 좋아하긴 하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내 마음이 정확히 어떤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마음은 복잡했다. 애초에 그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객관적으로 매력 있는 외모도 아니었고, 능력도, 재력도, 긍정적인 마인드도, 취향도, 유머 감각도 그냥 그랬다.
하지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끌림보다는 뭐랄까... 정확히는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아무리 싸우고 밀어내려 발버둥 쳐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지금까지의 현실이었다. 왜 난 계속 그의 곁에 있을까? 그의 짠한 인생을 구원해주고 싶어서? 그의 슬픈 눈동자를 보면 무장해제가 되어서? 나쁜 마음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순수함 때문에?
내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마 그와 헤어질 수 없을 것이다.
"좋아해."
좋아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단 말했다. 까딱하면 헤어지게 생겼는데 '너는 다른 남자들보다 내세울 거 없고 어쩌구, 그치만 나는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이유는 잘 모르겠고 어쩌구,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너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고 어쩌구' 이렇게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제비꽃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
"그래. 정말."
"처음 들어봐."
"내가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
"어."
"아닐 텐데... 어쨌든."
"정말 나 좋아해? 진짜 나 좋아하는 거 맞아?"
"응. 맞아."
제비꽃의 눈에서 또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소용없어. 무슨 의미가 있어 맨날 이렇게 싸우는데. 서울 가서 다시 생각해 볼 거야. 이제 내가 자신이 없어서 그래."
진짜 힘들었구나. 그가 이번엔 마음을 굳게 먹은 듯했다. 원래 평소에 관대한 사람이 한번 마음먹으면 독하다고 하지 않나? 그의 결심이 확고하면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나도 눈물이 났다. 그가 진짜 없어지면 내가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무서워졌다.
"그래, 결혼해. 결혼하자구."
제비꽃의 눈이 커졌다.
"정말? 나랑 결혼할 거야?"
"그래!"
나는 제비꽃의 어깨를 밀어 바닥에 눕혔다. 그의 배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제 나도 눈물범벅이었다.
제비꽃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류미야, 나 봐봐."
눈물을 닦고 제비꽃을 보았다. 그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류미야, 우린 이미 결혼한 거나 다름없어. 넌 나 없이 살 수 있니?"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난 너 없이 못 살아."
"..."
"결혼하자. 내가 류미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줄게. 진심이야."
"...그래."
일단 안심이었다. 제비꽃이 더 이상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쩌구 저쩌구'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아서. 의외로 이렇게 말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뒤 돌아보지 말자. 일단 눈 꼭 감고 이 사람과 함께 가보자. 내가 또 누굴 만나겠어.
그날 우리는 밤새도록, 동이 틀 때까지 바닥에 누워 이야기를 나눴다.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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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0대 중반 철벽녀는 결혼 원정기에서 결혼을 쟁취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상처뿐인 승리인 것을,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서부터 절절히 깨닫게 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 에필로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