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이트 클럽(Fight Club>
파이트 클럽(Fight Club)
감독: 데이빗 핀처
주연: 에드워드 노튼, 브래드 피트, 헬레나 본햄 카터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발목까지 때로는 허리까지 푹푹 빠져드는 진흙 같은 길을 지날 때는 그저 지금이 최선이라고 믿거나 끝에는 다른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갈림길 앞에 서서 망설이거나 방향을 잃고 헤맬 때마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누군가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하고 바란다. 누구라도 정답을 알려주기만 하면 주저 없이 따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뿐더러 설령 힌트가 있다 해도 대개의 경우 의심이라는 장애물에 가로막힌다. 결국 ‘구원자’의 존재 또한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복사본의 복사본의 복사본일 뿐이다.>
출근하기 위해 눈을 뜨고 그 하루를 다시 복사하기 위해 눈을 감는 직장인 중 개운한 상태로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삶에서 위안을 주는 것에 중독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잭(에드워드 노튼)은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누구나가 그렇듯 ‘그것만 빼면’ 큰 문제없는 일상을 보낸다. 병원에서조차 그의 병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며 괴로움을 호소하는 그에게 의사는 고환암 환자 모임에 가보라고, 거기에 ‘진짜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 잭은 그 말대로 환자 모임에 참석하고, 왕년에 보디빌더였지만 현재는 비대해진 몸과 가슴을 가진 밥(미트 로프)에게 얼떨결에 안겨 눈물까지 쏟아낸다. 그날 거짓말처럼 숙면을 경험한 뒤, 각종 치료 모임에 중독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처럼 질병을 가장해 모임에 섞여있는 말라 싱어(헬레나 본햄 카터)를 발견하고 그 존재를 의식하는 순간부터 다시 잠에 들지 못한다.
자동차 리콜 심사관인 잭은 정신없이 사고 현장을 오가며 차량에 점수를 매긴다. 사고를 당한 사람이나 그들의 사정 같은 건 차와 함께 전소되고 현장에는 오직 숫자로 치환될 ‘흔적’만 남아있다. 그렇게 사고에서 사고로, 비행기에서 다시 비행기로 이동하던 중 운명처럼 타일러(브래드 피트)를 만난다. 짧은 대화지만 거침없는 모습과 말투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잭은 집이 폭발하는 사고를 겪고 잿더미 속에 제대로 된 음식 없이 양념통만이 가득한 광경을 보며 허탈해한다. 자신이 안식처라 믿던 곳에 정작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사실, 그 많은 게 그저 양념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 잭은 타일러를 떠올린다.
<고통이나 상처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양잿물을 끼얹어 손이 타는 고통 속에서 잭은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고통과 무관한 장면을 떠올리려 애쓴다. 타일러는 소리친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굴지 말고 눈앞의 고통을 직시하라고. 수많은 괴로움의 순간에 ‘회피’를 선택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마주하기 두려워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게 귀찮아서,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문제를 외면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체념과 회피는 극복의 한 방법이 될지언정 해결책이 되진 않는다. 필요하지 않은 가구 뒤에, 비싼 옷과 신발 속에 감춰진 문제들은 계속 문제로 남아 삶을 좀먹는다. 옷과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치고받을 때, 명확한 고통과 분명한 상처는 그래서 쾌감을 준다.
잭은 몇 번의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을 잭의 마치 일부인 것처럼 지칭한다. 잭의 분노한 담관(Jack’s raging bile duct)이 되고, 잭의 식은땀(Jack’s cold sweat)이 되고, 잭의 들끓는 소외감(Jack’s inflamed sense of rejection)이 되고, 잭의 상처 받은 마음(Jack’s broken heart)이 된다. 자신을 여러 조각으로 쪼개고 맞닥뜨리는 상황에 적합한 행위의 주체를 골라낸다. 잭은 어째서 잭으로서 존재하지 못할까. 영화의 초반부, 잭은 모든 사건이 말라 싱어라는 여자로부터 비롯됐다고 말하지만 시작은 그의 고질적인 불면증이었다. 감정을 쓰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너무나 효율적인 우리의 몸은 반복되는 일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줄이려 한다. 시간과 공간을 떠다니는 동안 ‘노동’에 불필요한 감정들은 봉인되고 사용하지 않는 점점 감정은 녹슨다. 잭이 치료 모임에 빠져든 건 타인의 비극 속에서 얻는 우월감이 아니라 분출된 감정들이 주는 안정감 때문이었다. 치료 모임이든, 파이트 클럽이든 궁극적으로 잭에게 필요했던 건 온전히 감정을 꺼낼 수 있는 해방구였는지도 모른다. 파이트 클럽의 임무 수행 중에 죽은 밥을 어떻게 ‘처리’할지 오가는 말들 속에서 잭은 진심으로 슬퍼하며 소리친다. 밥은 물증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고. 어쩌면 그건 수많은 사고 현장에서 하지 못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누구나 매일 상상 속에서 변화를 꿈꾸지만 너처럼 실천하진 못해.>
삶이 변화로 요동칠 때 그토록 안정을 원하다가도 막상 안정에 이르면 다시 변화를 갈망한다. ‘변화’와 ‘안정’이란 단어가 나란히 놓인 저울을 오가며 수평을 이루려 애쓰지만 균형은 끝내 맞춰지지 않는다.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어서 언제나 기울어진 한쪽에 서서 반대쪽을 바라보며 상상하고 동경한다. 현실에서 체념된 잭의 욕망은 타일러라는 존재로 표출되는데 ‘지킬 박사와 개새끼’처럼 단지 인격이 분리된 두 사람처럼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에게 스스로를 각성시키기 위한 구세주의 역할을 부여한다. 그렇게 잭은 변화하고 제 임무를 다한 타일러는 잭에 의해 죽는다.
<희망을 버리면 자유를 얻게 돼.>
눈앞에서 건물이 폭발하고 피가 튀어도 주인공이 행복하면 영화는 ‘해피엔딩’이 된다. 투명한 창밖으로 고층 빌딩이 줄줄이 무너지는 장면을 바라보는 잭과 말라의 뒷모습, 거기에 더해진 픽시스(Pixies)의 <Where Is My Mind?>은 더없이 낭만적인 순간을 연출한다. 타일러는, 그러니까 다시 말해 잭은 희망을 버려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스스로의 머리를 쏘고 타일러로부터 해방돼 온전한 자신으로 말라 옆에 섰을 때, 비로소 희망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 말라 옆에 서있던 인물은 과연 잭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