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과겨울 Oct 11. 2020

불안도 쓸모가 있기를.

못난 마음을 기록하는 사람의 합리화.

계획 없는 휴일이면 불안감이 극심해져서 뭐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분주해진다. 어제 불현듯 스친 좋은 기분은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도 에너지가 있어서 어디로든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렇게 불안을 피해 도망 다니지만 결국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 기분이 된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싶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글을 쓰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싶고 나만의 뭔가를 만들고 싶다. 그러나 밥벌이는 늘 위태롭고 글도 쓰지 않고 음악도 만들지 않고 그림도 그리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휴대폰 메모장에는 정리해서 풀어보고 싶었던 생각들이 낱말로 남아있고, 로직은 결제 이후에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오늘은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색연필을 꺼내 뭔가를 그리기 시작하다가, 그리려는 시도의 흔적들만 몇 개 남긴 채 내팽개쳤다. 그리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쓰고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흐름이다.

며칠 전에는 본가에 내려가서 몇 년에 한 번 정도 규모의 대대적인 청소를 했고 50리터 쓰레기봉투 네 개 정도를 가득 채웠다. 거기엔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무수한 쪽지와 편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업 시간에 책상 너머로 던지며 주고받았던 낙서에 가까운 쪽지까지 구겨진 모양 그대로 서랍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그걸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둔 그때의 나는 그런 모든 게 언젠가는 추억으로 반짝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십 년 전부터 십여 년 전에 글을 쓴 대부분의 발신인은 지금은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는 ‘과거의’ 친구들이었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순간 내가 모든 일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구겨진 낙서 더미로 확인하니 징그럽기까지 해서 몽땅 쓰레기 봉투에 던졌다.

굳은 결심에도 쓰레기통 행을 면한 편지도 있었는데 그건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주는 약간의 선물 같은 메시지였다. 속세에 찌들어 인상만 험악해진 어른의 시점에서는 뭐가 그렇게 심각하고 어려웠나 싶지만 그때 했던 고민의 무게는 지금보다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내가 쓴 편지는 갖고 있지 않지만 받은 편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고민의 종류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버리지 않은 어떤 편지는 그때의 온기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었고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 더 따뜻하기까지 했다. 서울까지 챙겨 온 편지 중 하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썼는데 보내지 않은 편지였다. 거기에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상황과 마음들이 또박또박한 글로 적혀있었다. 실수로 내뱉는 부정적인 말조차 씨앗이 되어 자라날까봐 사실은 믿지 않는 희망을 믿는 척도 하고, 좋지 않은 상황에서 좋은 것들을 억지로 찾아내는 그런 시간들.

최근의 나를 슬프게 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모든 게 풋풋했던 시절을 지나 뭘 해도 풋풋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 풋풋함을 갈망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제대로 좋아해 보고 싶지만 그럴 줄 모르고 그런 마음을 받아본 적도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것에도 적당한 시기와 요령이라는 게 있어서 그걸 터득할 수 있는 때는 이미 지나버렸다고 말이다. 그런 상태에서 여러 개의 쪽지에 조각조각 나뉜 채로 간직되어 있는 기억하지 못했던 마음들을 발견했다. 어떻게 이런 걸 다 잊고 있었을까 하며 하나하나 읽는 동안 가라앉았던 마음이 조금은 둥둥 떠올랐다. 뭔가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게 조금 징그럽기는 해도 아주 나쁘기만 한 버릇은 아닌 것 같다.
 
서랍에는 몇 권의 다이어리가 있고, 매일은 아니지만 대나무 숲에 외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면 일기를 쓴다. 가끔은 기억하고 싶은 좋은 생각이나 사람들에 대해 쓰고, 대부분은 부끄럽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말하기 힘든 내용을 적는다. 그리고 그런 부끄러운 마음들은 시간이 지난 미래의 나에게 더 큰 부끄러움이 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위안이 되기도 한다.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여러 방향에서 개연성 없는 욕심이 생겨나는 것도 부끄러운 마음을 다른 형태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왜 그런 못난 마음들을 굳이 기록하고 흔적으로 남기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떤 식이든 사람들에겐 자신만의 찌꺼기 같은 감정을 처리할 방식이 필요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연말이 다가와서인지 계약 만료를 몇 개월 앞둬서인지 불안과 우울이 뒤섞여 마음을 괴롭히지만 작년에 비하면 확실히 올해는 조금 괜찮은 한 해였다. 세상에 만연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러니 불안에 파묻혀 습관처럼 슬픔만 쥐고 있진 말아야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참는 것에 익숙해지면 이유 모를 감정이 많아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