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가까운, 우정보다는 먼
뭐, 인연이 닿으면 또 보겠죠.
어깨를 툭툭 치고 돌아선 게 마지막, 그러니까 가장 최근의 이별 장면이었다. 연애다운 연애를 한 기억은 없는데 이별은 다양한 버전으로 쌓여갔다. 나와 상대의 마음이 크기가 다르다는 걸 알았을 때(그렇게 생각했을 때) 짜증을 뒤섞어 마지막이라고 했고, 착각으로 단꿈을 꾼 스스로가 한심해서 눈물을 찔끔 흘리며 마지막이라고 했고, 맞은편에 앉아있는 상대의 모습이 너무 후줄근해서 담담하고 개운하게 마지막이라고 했고, 구구절절 늘어놓은 메시지에 애틋함을 담아 서로의 안녕을 바라며 마지막이라고 했다. 이 모든 게 한 사람과의 이별이었고 그 이별들은 매 순간의 진심이었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하겠다’라는 건 불시의 결심이었다. 비장한 결심에 딱히 특별한 계기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 기력 없는 몸과 마음으로 지나간 시간들을 회상할 때에 아쉬움을 하나라도 줄이고 싶었다. 그런 ‘예상 아쉬움’의 목록에 ‘제대로 된 연애’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제대로 된’이라는 전제가 얼마나 막연하고 어려운 것인 줄.
그 결심 이전에 외로움은 연애와 별개였다. 혼자라는 기분과 혼자가 아니고 싶다는 건 완전히 다른 마음이었다. 자주 외로워했지만 외로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거기에 익숙해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외로워서 연애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내심은 경멸하기도 했다. 일시적인 처방을 만병통치쯤으로 여기는 태도가 바보 같았다. 누군가의 곁에서 안정감을 얻는 그들의 나약함이 싫었다. 돌아보면, 그렇게 연약함을 부정함으로써 타인에게 좌우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단단해진 것은 마음이 아니라 그러한 믿음 자체였다.
믿음에는 관성이 있다. 믿는 사람은 늘 믿을 이유를 찾고, 믿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믿지 않을 이유를 찾는다. 한 친구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나는 그 옆에서 자조했다. 연애라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사람을 믿는 능력이 필요했고, 누군가와 함께할 때마다 그 결여가 얼마나 메우기 힘든 것인지를 체감했다. 누군가의 사소한 말과 행동으로 마음이 들뜰 때면 어딘가에서 어둡고 수상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왔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은 곧 지나친 의존의 전조였으므로 혼자서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휘청대는 내 모습이 눈앞에서 반복 재생됐다. 들뜬 마음은 이내 가라앉았고 설렘은 불편하고 거북해졌다.
결심 이후의 의지는 내 뜻과 무관하게 작동해 그만둘 수도 없었다. 이렇게나 감정 소모가 크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했고, ‘제대로 된 연애’를 하려면 상대의 마음이 ‘제대로 된’ 것이어야 했다. 상대의 모든 말과 행동에 무게를 달고 크기를 가늠해 진심을 감별했다. 하지만 애초에 가짜라고 단정했으므로 모든 건 기준에 충족되지 못했다. 그건 내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쉽게 체념했고 끝을 낼 때마다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는 생각에 홀가분했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마음은 기필코 도망칠 핑계를 찾아서 멀어지고 나면 어김없이 후회했다. 후회하지 않으려 할수록 후회할 것이 많아졌다. 수많은 ‘만약’과 ‘어쩌면’으로 시간을 돌려서 더 나은 대사를 고르고 더 나은 결론에 닿기를 반복했다.
감정이 본격적으로 싹트기도 전에 끝난 관계들은 결코 ‘만약’의 상황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먼저 돌아섰지만 떠나는 건 언제나 상대방 쪽이었다. 그러다 제자리에 머무는 한 사람을 만났다. 끝을 내면 끝이 났고 손을 뻗으면 다시 닿았다. 우리는 여러 개의 ‘만약’으로 되돌아갔으나 상상과 달리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이라는 마침표 뒤에 매번 새로운 ‘만약’을 덧붙여 이어갔다. 내가 제멋대로 구는 것처럼 그도 제멋대로여서 엉망의 균형으로 관계는 지속됐다. 제대로 된 연애의 가능성이 사라진 자리는 동질감이 채웠다. 우리는 둘 다 자신의 감정을 다루고 타인을 감정을 대하는 것이 서툰 사람들이었다. 연애가 될 수 없어서 괜찮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연애가 될 수 없어도 괜찮았다. 그런 동질감의 기저에 있는 게 애정인지, 자기방어적인 합리화인지, 또 그때의 상대가 가진 진심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인연이 닿으면 또 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은 마지막을 예감한 인사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어제도 만난 것처럼 시간을 보내고, 언제나처럼 퉁명스럽게 굴다가 헤어질 때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지겹도록 익숙한 상황이 되풀이됐고, 늘 그렇듯 이제는, 이번에야말로, 갖고 있는 모든 진심을 담아서 지워지지 않을 끝을 썼다.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아쉬움 없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수집했다. 돌아오는 답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헤어져야 덜 아쉬울 수 있는지를 수차례의 경험으로 터득하는 것 같았다. 다만 만남의 순간만큼이나 이별도 달라서 어떤 이별은 시작부터의 기억을 지우고, 어떤 이별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종종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고 했다. 또한 그것조차 익숙해지면 괜찮아지는 때가 온다고도 했다.
부디 이번의 끝은 유효기간이 아주 길기를 바라면서 여전히 알 수 없을 것들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휘청이는 마음을 붙들어두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