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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겨울 May 31. 2020

관계의 끝에는 ‘갑자기’가 없듯 ‘깨끗히’도 없다.

담담한 이별, 담담하지 않은 이별

어느 날 갑자기 끝을 낸, 끝이 난 관계들이 있다. 그런 관계에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공유한 추억이 많은 친구나 가족까지 섞여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래된 관계는 특별하고, 인간관계에서는 함께한 시간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관계의 끝에 이상할 정도로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왜일까.
  
함께한 긴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그 끝에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사소한 사건을 계기라고 설명할 수 있어도 충분한 이유는 아니었다. 갑자기 찍힌 마침표는 사실 어느 순간에 찍혀도 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함께한 시간을 지나치게 과신하면 간과하는 것들 또한 많아진다. 시간은 긍정과 부정의 마음을 가리지 않고 견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작은 스크래치로 시작된 균열은 그 벌어진 틈으로 시간을 흡수해 순식간에 전체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래서 우여곡절의 긴 시간 뒤에는 오히려 ‘아쉬움’이라는 감정이 어울리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제각각의 방식으로 얽혀서 끊어진 관계를 하나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튼튼한 모양새와 달리 기막힐 정도로 순식간에 끊어진 경우도, 너덜너덜한 상태가 오랫동안 계속 되다가 불시에 끊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상대를 이해하려한 노력은 오히려 마음을 정리하는 유예 기간이 되기도 했다. 관계는 노력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일방적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서로가 다른 방향으로 각자의 노력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노력만으로 지속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노력은 무의미하다’와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다. 쓸수록 닳는 줄 알았던 감정이 쓰지 않으면 녹슨다는 것을 모르고. 해본 적 없는 것을 잘하기는 어렵고, 잘할 수 없는 것을 미리 단념하는 건 쉽다. 가끔은 굳이 되돌릴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마음이 진심인지 하지 않은 노력에 대한 합리화인지 헷갈렸다. ‘차라리 잘 됐다’라는 말에 무게가 실린 쪽은 늘 ‘차라리’였다.

한편으로, 짧은 만남이 우스울 정도로 긴 미련을 남기는 경우도 있었다. 긴 인연도 담담히 정리하면서, 찰나에 스쳐간 사람을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일관성 없는 마음이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마음의 크기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어떤 헤어짐에서 떠나고 남는 것은 모두 한 사람의 몫이었다. 많은 헤어짐이 그렇듯 어쩔 수 없는 끝이라는 걸 아는데도 좀처럼 담담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마음에 대해서는 내가 조금 더 내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정리하고 싶다.)

관계의 끝이 남긴 나쁜 감정조차 휘발되고 나면 추억과 사람을 분리해 과거를 현재와 연관 짓지 않고 떠올릴 수도 있게 된다. 아무리 오래 알았든 함께한 추억이 많았든 결국에 멀어질 사람들이었다고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매번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이렇게 순식간에 닫는 건 뭔가 좀 잘못되었다는 자책, 곁에 있는 누구든 언제나 멀어질 수 있다는 관계에 대한 비관, 그 비관에 익숙해지는 씁쓸함. 관계의 끝에는 ‘갑자기’가 없듯 ‘깨끗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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