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전쟁>
최근 홧김에 여성의당에 정기 후원을 하기 시작했다. 한창 진행 중인 대선 후보들의 선거 운동을 보면서, 그들의 공약들을 보면서 너무 절망스러워서,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성의제를 가지고 지금도 미아역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후원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다.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여초 가족에서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 여초 업계에서 일하고 있어 살면서 딱히 성차별을 눈에 띄게 겪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이, 이 나라가 성평등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아직 겪지 않았다고 영원히 겪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살다보면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인권에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그저 평등한 인간의 인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관심을 갖고 이를 지키는 것에 응원을 보내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성별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난 그렇게까지 요즘 여자들이 차별을 겪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페미니즘과 여성 인권 문제를 자신이 관심 가져야 하는 명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기분이 들곤 한다.
하루에도 몇 건씩 일어나는 남성들이 벌이는 범죄의 희생양이 된 여성들의 기사를 볼 때마다 욱하고 눈물이 나는데, 가끔은 그런 내가 너무 과한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열 살도 되지 않은 여자 아이들을 지참금 때문에 늙은 남자에게 시집 보내고 이를 거부하면 명예 살인 하는 파키스탄과 요르단의 아버지와 삼촌들, 민주화를 외치는 광장에서 모르는 남자들에게 끌려가 성폭행 당하는 이집트 여성들, 종교로부터 박해받은 아일랜드 여성들, 지금도 어디선가 피를 철철 흘리며 할례 당하고 있을 아프리카 여러 마을의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 지구상에서 '여성' 이라는 이유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고, 그나마 안전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같은 사람은 극소수의 선택받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내가, 내 친구가 아직 괜찮으니까?
영국의 유명한 방송 기자이자 저널리스트 인 수 로이드 로버츠 (Sue Lloyd-Roberts) 가 취재하고, 그의 딸인 세라 모리스가 정리하고 펴낸, 그리고 JTBC의 심수미 기자가 번역해서 2019년에 한국에 출간된 <여자전쟁>을 이제서야 읽었다. 이 책은 2016년 출판된 르포로 작가가 여러 나라를 다니며 여성 인권 문제의 참상을 취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할례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감비아, 군부 독재 기간에 체포된 수천 명의 여자들에게서 태어나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죽인 군인들에게 입양되어 자란 아이들과 그들을 찾아 해메고 있는 할머니들이 있는 아르헨티나, 사회적 약자나 버림받은 여성들을 종교의 울타리로 끌어들여 박해한 아일랜드의 수녀원. 수 없이 많은 나라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처처참한 광경들을 나는 글로 읽었을 뿐인데도 이런 범죄를 내가 당한 것처럼 마음이 피폐해졌다.
하지만 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예요. 만약 지금 집에 돌아간다면 여자아이들에게 할례를 거행해야 하는데, 오직 우리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한다는 건 너무나 이기적인 짓이죠. 가끔씩 우리 아이들에게 공평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돌아가 할례를 할까도 싶은데, 그럴 땐 자문해봐요. 우리 아이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여자아이들이 나에게 할례를 당하게 될까? 얼마나 많은 여자아이들에게 내가 영향을 끼치게 될까? 내가 처한 현실을 얼마나 많은 여자아이들이 대물림하게 될까?
(감비아, 한 마을의 할례자 집안의 어머니 마이무나 Maimouna 인터뷰 중)
이런 상황에 놓여서 평생을 살면 더더욱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힘들고, 설사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안다. 눈 앞에 닥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만한 희생을 치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고향을 떠나고, 남아 있는 딸과 자매들을 구하지 못해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린다.
그가 설명하기 위해 '전통'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을 상대로 하는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인류는 세계화되고, 훨씬 더 많은 정보를 흡수하고, 분명히 더 풍부한 지식을 갖추었는데도 시대에 뒤처지고 이해할 수 없는 전통을 경외하는 마음을, 이성을 무시하고 법을 어기면서까지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전통이라는 아우라는 여성혐오를 감추고 심지어 범죄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얼마나 편리하게 이용되는가?
p.285 (세계에서 여자로 살기 가장 어려운 곳, 인도)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많은 곳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자행되고, 그것을 그대로 방관해 왔던 걸까.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은 "대한민국이 강간의 왕국이냐" 고 하지만 이 책을 읽으니 "지구가 강간의 별이냐"고 묻고 싶어진다.
살인, 약탈, 강간은 언제나 전쟁의 부산물이거나 혹은, 1991년 걸프 전쟁의 연합군에 의해 더욱 유명해진 좀 더 현대적인 용어를 쓰자면 '부수적인 피해' 였다. 1937년 '난징의 강간' 에서 수만 명의 중국 여자들이 일본 제국군인들에게 강간, 살해 되었다. 1944년, 독일을 가로질러 서쪽을 형해 가던,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 군대에 의해 수많은 독일 여자들이 강간당했다. 수없이 많은 베를린 여자들이 1945년 11월에 도시가 함락되고 나서 군인들에게 강간 당했다.
(중략) 크로아티아 기자이자 작가인 세아다 브라니치는 비 세르비아 여자들에 대한 강간이 '위대한 세르비아 팽창 정책' 의 일환이었다고 말한다. "우리 국토에서 다른 민족을 몰아내자는 것. 그래서 그들은 가공할 계획을 고안해 냈습니다. 비세르비아인의 집에 침입에 강간하는 것이죠."
(중략) 전범 재판에 피고인으로 출석한 장교들은 세르비아 군대의 사기 진작을 위해 강간 지시를 내렸다는 점을 인정했다. 여성의 몸을 강간하는 것이 정복 과정의 일부라고 군인들은 교육 받았다.
p.325~326 (강간이라는 전쟁 무기, 보스니아와 콩고민주공화국)
역사 속 과거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최근 있었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수많은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성폭력을 겪었고, 수단, 에티오피아, 콩고 등 다양한 국가의 내전 중에서도 성폭력은 빠지지 않는다. 그것 뿐인가. 그냥 지금 이 시간, 대한민국에서도 하루에 500건 이상의 성폭력 범죄가 발생한다. (2023년 여성가족부 집계 기준) 여성이 남성을 강간했다는 뉴스를 이만큼이나 많이 본 적이 있는가? 전세계적으로 어떤 한 성별이 다른 성별을 가진 인간을 대상으로 이렇게까지 많은 성범죄를 저지른다면 전염병을 막기 위해 백신을 의무적으로 맞게 하는 것처럼 성범죄를 저지를 수 없게 하는 주사라도 의무적으로 맞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BBC 수석 국제 특파원 리즈 두셋은 이 책의 맺음말을 쓰기 전에 '2016년 여성인권'을 검색하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여성보다 소에게 더 많은 권리가 주어진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허핑턴포스트의 기사를 발견한다. 나는 조금 전 '2025년 여성인권'을 구글에 검색해 보았다. 올해는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 4차 세계 여성회의에서 양성평등을 위한 로드맵인 '베이징 선언 및 행동강령'을 채택한 지 딱 30년이 되는 해이다. Human Rights Watch에서 발행한 <2025년 세계 인권 보고서> 에 의하면 폴란드에서는 비동의 성관계를 강간으로 인정하는 법을 개정했고, 멕시코의 가장 큰 주에서는 낙태 비범죄화를 위한 법을 개정했다. 하지만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낙태 접근성이 제한되고 있고 특히 흑인, 라틴계, 원주민 여성들을 향한 차별이 심해지고 있으며 여전히 콩고와 아이티, 아프가니스탄 등 여러 지역에서는 여성들이 심각한 성폭력에 노출되는 중이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나는 대표가 여성인 회사에서 남녀로 구성된 팀원들과 함께 조직의 리더로 일하고 있지만 몇 주 뒤 열릴 예정인 대통령 선거에는 여성 후보가 단 한명도 없고, 주요 후보들의 공약에서도 성평등, 여성 관련 정책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는 중이다. 내년의 나는, 5년 뒤의 나는, 20년 뒤의 나와 내 여성 친구들, 언니들은 괜찮을 예정인 걸까?
수 로이드 로버츠는 사우디 아라비아 여성들에 관한 장에 이렇게 썼다.
"딸은 어머니의 인생을 보고 배운다. 나는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며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고 내 딸에게 수없이 강조해 왔다"
그리고 딸인 세라 모리스는 이 책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엄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자면, 네, 여성들은 시도하고 경쟁해야 합니다. 엄마가 우리에게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요."
절망적이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싸워 갈 엄마, 언니, 선배가 필요한 시기다.
가엘 쇼안느 Gaelle Choisne (b.1985) 의 <Steles - Port-au-Prince>. 프랑스 셰르부르에서 태어난 프랑스-아이티계 현대 미술 작가로, 파리와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식민주의의 유산, 자원 착취, 환경 위기, 여성성과 같은 주제를 탐구한다. 2024년 마르셀 뒤샹 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광주에서는 자연재해로 파괴되고 버려진 구조물의 잔해와 폐허를 포착해 애도의 공간을 만들었다. @광주비엔날레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