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 ; 슬픔은 노을을 좋아해
아침에 일어나면 나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창문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에 안심하고 불어오는 바람이나 새소리 같은 것들에 내가 아직 제주에 있음을 실감한다. 이렇게 자기 전이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내가 제주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계속 제주를 확인하게 되는 것 같다. 다음에는 더 오랫동안 머물면서 하루 정도는 집에만 있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주가 여기 말고도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이곳은 좋다.
자유를 생각한다. 홀로 오는 여행에서 가장 좋은 점은 '자유'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 난 언제 가장 자유로웠나. 나는 지금 자유로운가. 어쩌면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생각해본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때, 그때 사람은 조금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이걸 알았다면... 조금 적정한 온도의 사람이 되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셋째 날 아침도 드립커피를 홀짝였다.
내가 머무는 곳 주변에는 해안뿐이어서 해변이 보고 싶었다. 나는 본디 준비성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라 여행에서 뭐가 필요한지 전혀 시뮬레이션이 안 되는데, 이번 여행에서 나 자신이 가장 기특한 점이 있다면 돗자리를 챙겨왔다는 사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대단한 준비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돗자리를 가방에 넣고 금능으로 향했다. 금능은 숙소에서 버스를 타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금능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 온 기분이었다. 넘치는 사람들과 야자수가 줄을 서 있는 큰 도로. 내가 지금까지 너무 조용한 제주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도저히 저 사람들 사이 내 초라한 돗자리가 있을 곳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냥 해변 올레길 14코스를 따라 협재로 걸었다. 일단 걸었다.
해변을 따라 걷다 보니 간간이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 보였다. 해변 뒤 가게에 들어가 제주 에일 한 병을 사서 돗자리에 앉았다. 주변은 마치 축제와 같았다. 투명하고 파랗다 못해 달콤한 맛이 날 것 같은 바다와 하얀 모래들을 보고 있으면 무해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모래에 '용기'라는 단어를 끄적이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용기를 비난했다. '난 왜 이렇게 겁이 많을까', '난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없는 걸까'.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갑자기 내가 대답했다. "너 혼자 밥 먹는 거 못하고 사람 많은 곳에 못 있잖아." 그리고 "너 너랑 같이 있는 거 싫어했잖아." 처음 들어보는 내 목소리였다.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울었던 것 같다. 엉엉 울었다. 여기에서 알았다. 나 매 순간 용기 내고 있었다. 제주에서 용기로 숨을 쉬고 있었다.
울음 섞인 숨을 들이켜니 꽤 전부터 틀어놨지만 들리지 않던 노래 가사가 선명하게 들렸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갤 들어 하늘을 봐 생각보다 멀리 있지는 않아 평화로운 마음 반복되는 하루와 마주치는 얼굴들 무엇보다 소중해 여기 너와 나".
잠시 내가 바다가 된 기분이었다.
점점 하늘과 바다가 붉게 물들고 해가 지기 시작했다. 어두워지면 겁이 난다. 주변 카페에 가서 따뜻한 쑥 라떼를 사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꼭 어두워지고 집에 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점점 바다가 해를 집어삼키고 하늘과 바다는 낮처럼 뜨거워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아무 말도 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지금만큼은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편안했다.
사람을 미워하면 마음을 잊어버리게 된다. 사람을 싫어하면 존재를 잊어버린다. 난 한동안 사람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생각했다. 나를 모르는 척해줬으면 좋겠다. 이제 '다름'을 그만 인정하고 싶다. 부딪히며 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도망쳐왔다. 좋아하던 그 치열한 세상도, 뜨거운 마음도, 그리고 나도 등지며 도망쳐왔다. 겨우 육지 끝에 앉아있으니 그게 보였다.
제주에서 내가 나로 받아들여짐으로 다시 사람을 생각했다. 분명히 이 노을을 다들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겠지. 참 사랑스럽다. 용서받지 못할 영혼이란 없다 했다. 난 계속 그 자리에서 그들을 생각했다.
모두의 안부를 묻고 싶은 하늘이었다. 사람을 너무 좋아해 사람을 싫어하던 나에게 팀장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예진님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 사람도 그 마음을 분명 알고 있을 거예요'. 누군가를 좋아해 버려서 힘들어질 때면 이 말을 계속 생각했다. 그럼 그 마음을 내 에너지로 바꿀 수 있게 된다.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간직하며 살아가는 건 버겁지만 나름대로 충만하다.
제주 숙소의 사장님 두 분과 하찌. 그리고 내 반대편 방에서 지내며 매번 하루를 물어봐 주고 차와 사진을 좋아했던 게스트, 자주 가던 카페 사장님, 부대찌개를 맛있게 해주셨던 식당 사장님, 침을 놔주시며 허리 디스크를 설명해주셨던 한의사님, 투덜거리며 앞머리를 잘라줬던 미용실 아줌마. 그 사람들을 좋아해 버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좋아할 것이다.
다시 노래 가사가 들려온다.
We don't have to say goodbye
작별인사는 하지 않아도 돼
Just a smile and goodnight
미소 띈 '잘 자' 면 충분해
Let us share a drink and dance
잔을 높이 들고 함께 즐기자
Sing a song we don't understand
이해하지 못해도 함께 노래하자
A lullaby for those awake
깨어 있는 자들에겐 자장가를
A humble bow for those ain't
잠에 빠진 자들에겐 겸손의 인사를
And a thank you hope to see you soon again
또 만날 날을 위해 희망을 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