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보내는 메일 2

2호 ; 절벽 위 텐트

by 선재

https://youtu.be/NAf-PjyGOVM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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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아침이 왔다. 다른 게스트들과 함께 쓰는 거실에 괜히 나가기가 마음이 불편해 계속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다 겨우 용기를 내 나갔다. 씻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마을 분식점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빵집에 가서 드립커피를 샀다. 나도 모르게 "너무 맛있어!"하고 허공에 외쳤다.


어제부터 거슬렸던 앞머리를 동네 미용실에서 잘랐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할머니들이 앉아있는 미용실이었다. 마치 외국어처럼 들리는 사투리들 사이 미용실 사장님이 "집에서 잘라도 되겠구먼" 투덜거리면서 드라이까지 해주셨다. "2천 원만 줘." 난 2천 원에 제주를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앞머리가 맘에 들었다는 뜻.)


짧게 잘린 앞머리와 함께 올레길 12코스를 향해 걸었다. 이전에 제주도에서 오래 지낸 언니가 추천해준 카페에 가기 위해서이다. 지도를 보고 열심히 올레길을 찾아갔는데 산 입구가 나왔다. 뭔가 잘못되고 있는 기분과 '곧 평지가 나오겠지...' 라는 생각이 한 30분 정도 지속되니 평지가 나왔다. 몇 번이나 중간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뻔했지만 혼자 산에 있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냥 앞만 보고 걸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할 때 눈앞에는 바다와 섬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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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서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 불안하고 두려웠던 것들이 나를 엄습했다. 생각 그만하자. 라고 생각하기를 연습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해서 괴로운 날들이 이어진다. 하루에도 수백 번 나를 무너뜨리고 세우는 순간들이 지나간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잘 풀어나갈 거라는 믿음. 그게 필요한데 내가 나에게 주는 믿음은 아직 신뢰가 떨어진다.


우연히 읽은 책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지내는 심정에 대한 문장이 인상 깊었다. 마치 절벽 위에 텐트를 치고 있는 기분이라고. 아찔하고 아름답다고.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 건지 궁금해졌다. 요즘의 난 절벽에 오래 된 신문지를 깔고 있는 정도가 되려나. 회사를 그만두고 조금의 안식을 취하고 있다. 뜨거움이 향할 곳을 잃어서 가슴 속에서 까맣게 재만 남은 것 같다. 용기는 생기다가도 사라지는 것들인지 궁금하다.


한참 바다 옆을 걸으니 카페가 나왔다. <day off Tuesday>. 혹시 화요일이 영어로 Tuesday인가요, 그리고 그게 오늘인가요. 네. 그냥 이유 없이 15,000보를 걸은 사람이 됐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마치 취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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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기 위해 동네를 거니는 일은 낭만적이다. 아침의 기운을 잔뜩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다음에 다시 이곳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점 뜨거워지는 햇빛과 은은하게 느껴지는 녹녹한 바닷바람을 느끼고 있자면 작년 이맘때 봤던 <허니와 클로버>가 생각난다. 같은 미술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값싼 하숙집 안에서 같이 살면서 부딪히고 열심히 사랑하는 내용이었다. 유치하기도 했지만, 일본이 생각하는 '청춘'은 이런 것들이겠거니 싶은 영화였다. 난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하는 대사들을 좋아한다. 천재 미술 소녀를 순수하게 열렬히 좋아하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이 귀엽고 자기의 진로는 미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 가는 과정이 멋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남자 주인공은 답답한 마음에 산길을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옆을 지나가는 차들이 창문을 내리고 그를 응원하는 목소리를 보낸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는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까."


"나는 그동안 두려웠던 것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어쩌고 싶은지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 그리고, 그래도 가차 없이 흐르는 나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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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실히 일상을 지켜내는 것마저도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느껴지는 요즘이다. 하루하루들은 두려울 정도로 흘러가고 매일을 버티는 기분들이 이어진다. 당장 작년의 내가, 지금이 아닌 나의 모습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허니와 클로버>는 이런 나를 '청춘'이라고 착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영화다. 저 미래의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편지라도 받아보고 싶은 심정. 평행우주가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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