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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징키 Jun 18. 2024

1교시, 국어가 배신했다

 아침 8시. 모든 학생이 자리에 앉아 있다. 그리고 삼십 분 뒤, 한 두 명씩 고개를 까딱까딱 거린다. 다시 삼십 분 뒤, 까딱거리던 학생들은 엎드리고, 또 다른 열 명이 까딱까딱, 끄덕끄덕, 흔들흔들. 

 아니, 이 귀중한 시간에 잠이 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의욕이 넘쳤으니까. 이 생활을 일 년이 넘게 한 어느 날, 국어 지문에 코를 박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우주여행, 그거 돈 주고 갈 필요가 없는 거구나. 아침부터 행정법, 압전체, 자크 데리다의 이론들을 읽고 있으면 눈을 뜨고도 우리 은하를 넘어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여행을 갈 수 있는 걸.



-국문과 나왔으면 국어 1등급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국어 임용시험을 준비한 친구들도, 수능 시험을 공부한 나의 대학 동기들도 입을 모아 말한다. 수학보다 국어가 더 어렵더라!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서로 사맛디 아니할셰. 옛 한글의 어원을 공부했다. 산에는 꽃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문명의 시간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김소월의 아름다움을 탐구했다. 바리바리 바리데기, 바리공주야. 다양한 이야기로 전해지는 설화를 연구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내가 접한 텍스트에는 데이터 언어도, 법률 용어도 없었다. 민망하지만, 서른이 가까이 되도록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문학만을 사랑한 죄를 아주 달게 받는구나, 진짜.


-정리 집착병

 이게 내 문제였다. 한 문단을 읽고 내용 정리하고, 또 읽고 정리하고. 물론 내용을 후루룩 훑고 넘겨버리는 ‘덤벙이’ 학생에게는 정리하는 공부가 매우 필요하겠지만.

 시험에서는 시험지 위에 글씨를 쓸 시간이 없다. 쓰는 순간부터 그 지문 하나만 읽고 끝나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특히 나처럼 글씨도 또박또박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더더욱! 공부는 정리하면서 하고, 시험에서는 그냥 읽어나가려 하니 제대로 읽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멈췄어야 했다.) 그래서 기호를 썼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웃긴 건, 기호를 쓰면서 그 기호의 규칙을 만들어버렸다. 동그라미는 학자의 이름, 세모는 부정적인 견해, 네모는 용어의 정의 등등. 결국 내용을 읽는 게 아니라, 또 정리하는 것에 집중을 했다. 분명히 일정한 시간을 쏟고 있는데, 왜 머리에는 하나도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거야? 나이 들어서 그래, 나이. 애꿎은 나이만 욕을 먹었다.


-기호(記號/嗜好) 없는 독서

 그날은 날씨가 너무 좋았다. 토요일이었다. 괜히 마음이 들떴다. 그래서 EBS 수능특강을 아무 곳이나 펴서 읽었다. 놀라웠다. 산화와 환원에 대한 글이었는데, 책에 글씨 하나 기호 하나 안 쓰고도 이해가 되었다. 다른 페이지를 찾아 부랴부랴 읽었다. 또 놀라웠다. 기출문제집을 들고 와 쌓아 놓고 읽었다. 한글을 깨친 어린아이처럼.

 비밀은 기호 없는 독서였다. 손으로 쓰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버린 순간부터 글이 눈에 들어왔고, 내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정리했다’라는 안도감이 없으니까 문단의 내용을 암기하려고 애썼다. 거기다 마음이 급해 무작정 읽으며 들어가는 태도도 고쳐지기 시작했다. 기호를 쓰지 않으니 용어의 정의를 정확히 이해하며 넘어가야 했다.

 그럼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손만 안 쓰면 독서를 다 잘할 수 있나요? 당연히 아니지요! 수험생활을 끝마치고 알았다. 그날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내용이 정리가 되었던 건 그에 상응하는 배경지식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시와 소설만을 사랑하던 내가 거시 경제와 미시 경제의 원리를 찾아 읽고, 푸코의 진자 운동 영상을 찾아서 보고, 최신 기술과 관련된 기사들을 직접 모아가며 정리했다. 

 그렇게 나의 세상은 넓혀져 갔다. 

     




 *후회가 되는 것이 있다면, 한자어이다. 

 아주 악독하다고 소문이 난 '기축통화'(2022학년도 수능) 지문에서도 '유동성', '금 본위', '절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지문의 전체적인 내용을 빠르고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최근에 시행된 시험지에서도 '과두제(寡頭制)', '개시제(開始劑)'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물론 지문에서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만, 한자어를 잘 알고 있다면 반복해서 설명하는 문장을 '음~음~'하면서 단축시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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