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

내 삶의 마지막 장면

by 이소현

정신을 차렸을 땐 아수라였다. 이곳으로 나를 데리고 온 언니는 온데간데없었다. 윗입술을 아랫입술 아래로 감췄다. 할머니가 보았다면 입을 ‘톡’ 때리며 ‘입! 입!’ 그랬을 것이다. 할머니가 생각나자, 눈물이 나오려 했다. 간신히 참느냐 입술은 바르르 떨리고 콧구멍은 벌렁거렸다. 그 상태로 옆에 앉은 아이를 쳐다봤더니 그 아이도 나랑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아이는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도망쳐. 도망쳐야 살 수 있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 묻는다면 그건 내가 네 살 배기라서다. 앉아있는 시간 40분, 뛰어노는 시간 고작 20분만 주는 정규 교육 과정을 받지 않았을 시기에는 가능하다. 눈썹의 미세한 진동과 눈동자의 빛만 보고도 상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신은 어른이라, 그것도 너무 많이 앉아있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지만 말이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 대부분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었다. 몇 명은 동그랗게 모여 있었지만, 말이 없었다. 웃음이 사라졌다. 무리에서 슬금슬금 멀어져 신발이 뒤엉킨 곳까지 도착했다. 쭈그리고 앉아 텔레비전 뒤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을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회색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철컥. 문이 열렸고 네 개의 다리가 보였다. 커다란 그림자가 내 앞에까지 와서 닿았다. 난 본능적으로 그들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때의 난 인간의 한계를 깬 달리기를 선보였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백 텀블링과 풍차 돌리기를 하며 계단을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잡히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유진아, 할머니 집에 갔다가 금방 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 나보다 키도 크고 예쁘게 생긴 ‘언니’라는 사람과 노느냐 할머니의 당부는 귓바퀴를 스쳐 갈 뿐이었다. 그 언니는 문득 모든 것이 시시했는지 재밌는 곳이 있다며 같이 가자 했다. 동생이란 존재에게, 특히 한 번도 언니를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마치 그녀의 손에 걸린 보석 반지 같았다.

언니의 손을 잡고 후생사 사거리를 지날 때였다. 할머니가 가지 말랬는데. 여기 언덕에 마녀가 산대! 내가 머뭇거리자 어느 순간 나타난 그녀 또래의 언니들이 힐끔 쳐다봤다. 그래, 그럼 넌 집에나 가. 그러고는 유유히 걸어가는 언니들을 바라보자 덜컥 겁이 나 재빠르게 그들의 뒤를 쫓았다. 보석 반지의 숙명이었다.


계단에서 땅으로 내려오자마자 아무렇게나 달렸다. 네 살 인생에 후진은 없다. 그렇게 달려서 도착한 곳이 어디냐고? 낭떠러지보다 더 무섭다는 차도였다. 차들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번 윗입술을 아랫입술 아래로 감출 수밖에 없었다. 어른이라도 지나간다면 그의 손을 잡고 같이 건널 생각이었지만,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필요할 때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여기 내가 있어요. 좀 봐주세요. 기적처럼 차들은 멈췄다. 창문을 내리고 무어라 소리쳤는데 들리지 않았다. 달려야 했고, 멈출 수 없었다. 섬과 섬 사이를 내 한 몸에 의지해 헤엄쳐야 하는, 영겁의 시간이었다.

막 차도를 건너 내 무릎까지 오는 연석에 발을 딛는 순간 난 깨달았다. 살았다. 살았다! 그제야 건물과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언덕 아래에서 들리는 목소리. 유지나- 유지나- 허리에 손을 올린 할아버지와 앞코가 막힌 보라색 욕실 슬리퍼를 신고는 허리를 숙여가며 나를 부르는 할머니가 보였다. 두 팔을 벌려 신나게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할-머어-니-. 할-머어-니.


얼굴이 붉다 못해 까맣게 된 할아버지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엄마 사이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의 등 뒤에서 하나로 묶은 엄마의 머리카락을 연신 만졌다. 난 살았다는 것이 너무 기뻤는데 할아버지는 뿔이 잔뜩 나 있었다. 나를 찾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나를 데리고 갔던 언니네 집에 마구잡이로 들어간 할아버지는 언니의 할머니에게 ‘똑같이 애비, 애미 없는 사람 만들려고 작정했냐!’며 소리를 질렀다. 미영 아부지-. 미영 아부지-. 할머니의 간절한 외침과 할아버지의 번뜩이는 눈빛 사이로 울고 있는 언니와 그녀의 할머니가 보였다. 나로 인해 모두의 심장에 대못이 박히는 순간이었다.

미영아, 이제 가. 할머니가 엄마를 일으켜 세우자, 할아버지가 또 버럭버럭했다. 네 딸, 네가 데려가 키워 인제! <네 딸, 네가> 시리즈가 또 시작될 참이었다. 그럴 땐 좋은 방법이 있다. 난 냅다 서럽게 울었다. 할아버지는 유독 나의 눈물에 약했으니까. 어느새 그의 눈도 촉촉이 젖어있었고 등을 돌려 앉으며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모로 누운 할아버지 옆에 나를 눕히고 할머니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는 고단하고도 이상했던 하루를 돌아보았다. 참 이상도 해. 하늘에서 뚝 떨어진 흰 강아지 한 마리가 언덕을 막 뛰어 내려오는데, 저 강아지는 왜 저렇게 뛰어오나 그랬어. 아이고, 저 강아지가 우리 유진이면 얼매나 좋아, 얼매나 좋아 그러는데 느 할아버지가 ‘유진이 온다!’ 소리쳐서 봤더니 진짜 우리 유진이자너. 분명히 강아지였는데.

사실 할머니는 저 멀리서 오는 것이 손녀딸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팔을 벌리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멀리서 할머니를 알아보면 양팔을 벌려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우리의 인사법이었다. 다음에도 저기 어딘가에서 내가 그녀를 우연히 보고 반가움에 달려가면, 그때도 그녀는 ‘저 강아지는 왜 저렇게 뛰어오나!’ 그러려나.



007_1133_a.jpg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 이끌려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떠올려야 했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