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를 부끄럽게 해요> 2. 보다 깊은

by 이소현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면서 파란색 투피스를 입은 여성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영화인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았다. 제목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아는 척할 수 없다. 만나는 사람마다 사진 찍어달라, 사인해 달라며 그의 휴식 시간을 방해할 테니까. 한 번도 유명해 본 적 없으면서 유명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이것도 오지랖인가. 제목도 배우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있다. 영화에 집중하던 주원의 옆모습과 ‘이건 또 무슨 영화인가?’ 생각하다가 화면에 갑자기 등장한 여성의 얼굴에 놀라 귀를 막던 나의 모습.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다 자꾸만 눈이 마주쳤다.

“하이. 나는 에이미예요. 어디서 왔어요?”

“제 이름은 재,희인데 그냥 제이라고 불러주세요. 한국에서 왔어요. 당신은요?”

“독일 사람이에요. 홀리데이를 보내러 왔나요?”

홀리데이라. 그 단어는 너무나 상큼하지 않은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숨고 싶어서, 이런 은유적인 표현을 설명할 수 있는 고급 단어를 몰랐다. 단어들을 생각하고 문장을 정리하는 사이 시간이 꽤 흘러버렸다. 그래서 대답했다.

“예쓰, 예쓰. 홀리데이.”

“와우, 러블리.”

멋쩍게 미소를 짓고 나니 정적이 찾아왔다. 먼저 인사도 건네줬는데, 너무 단답이었나. ‘불친절한 코리안’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단어들을 조합했다.

“음, 사실, 전에 만났던 애인과의 약속이 있어서 왔어요.”

에이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아, 이건 너무 나갔나.




약을 까고 약통에 담는 새벽 시간 내내 속으로 욕을 했다. 열은 열대로 오르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매해 여름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몸살에 시달렸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면 ‘아, 아프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어김없었다.

꼴에 도도한 척하는 거 알지. 저번에 방사선과 막내가 말 걸던데 쌩하더라. 웃겨 증말. 직장 동료들은 자기들과 같은 지방의 출신이 아닌 나를 경계했고, 그 지역의 대학교를 나오지 않은 나를 배척했다. 도도한 게 아니라 말수가 적은 거고, 방사선과 막내가 언제 말을 걸었지?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나에게 감정이 상했는지 모르겠는데, 뒤에서 중얼거리지 말고 나랑 한판 붙자고 이것들아! 신경질적으로 PTP 포장지를 내리치는데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포털 사이트 캘린더에는 7월 25일 아래 ‘베를린’이라고 적혀있었다.

첩보영화 주인공이었다면 그런 지령을 받고 모든 걸 중단한 채 뛰쳐나가겠지만, 그저 멍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베를린은 뭐고, 7월 25일은 또 무슨 날이고. 그렇게나 고상한 별명을 지닌 7월 25일 생이라도 있었나. 베를린을 속으로 되뇌며 약을 자르다가 생각이 났다. 얼굴이 빨개졌다.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것에 비해, 흔적은 너무나 깊고 또 길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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