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미안해.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내리고 있었거든. 근데 여기 사람들이 다 같이 버스 기사에게 소리 질러 줘서 내렸어. 독일 사람들은 진짜 친절한 것 같아. 눈 마주치면 인사하고 꼭 말을 걸어줘.”
“다행이네.”
“응응. 다음에는 우리 꼭 베를린에 같이 오자.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
유럽에 있는 주원과 통화가 끝나면 침대에 누워 그가 보낸 스위스의 롱샹성당이라던가, 베를린 국립미술관과 같은 건축물 사진들을 넘겨 보았다. 르 코르 뷔지에,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주원이 아니었다면 관심도 없었을 건축가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혀가 입천장을 살짝살짝 건드리는 게 아주 간지럽고 재밌는 이름들이다. 그들이 빛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여서 신성한 것은 더 신성하도록, 현대적인 것은 더 현대적으로 만들었다는데, 궁금했다. 그가 있던 빛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십 년 뒤에는 나도 그곳에 있을 것이라 약속했다. 나란히 서서 손 그늘을 드리우고 색색의 발코니를 올려본다. 콘크리트 벽을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주원은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나는 그런 주원을 바라본다. 사진 속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이 되는 상상을 하며 잠이 들곤 했다.
“그래서 지금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인가요?”
에이미는 역방향으로 가는 자리가 어지럽다며 어느새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눈이 어서 말해보라며 재촉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영화배우의 관심을 끌게 되어버렸을까.
“그는 약속을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무엇보다 나를 싫어해요.”
“오, 말도 안 돼요.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싫어할 리가 없어요.”
거짓말. 우리 만난 지 30분도 안 되었는데, 내가 ‘러블리’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죠.
나도 기억하지 못한 10년 전의 약속을 주원이 기억할 리가 없다. 당신도 헤어진 연인에게 했던 수많은 맹세와 약속을 기억하지 못할걸. 그런 건 이별과 함께 소멸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심술궂게도 캘린더의 알림은 아주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감정을 스쳐 지나가며 바람을 일으켰다. 자주 주원을 떠올렸다. 서늘한 말, 작은 웃음소리, 가느다란 머리칼, 연갈색 눈동자, 독특한 걸음걸이. 에이미에게 정정하고 싶다. 이미 지나버린 것을 놓지 못해 회사를 그만두고 여기로 날아온 내가 이상한 거라고. 이럴 때는 ‘기괴한’이라는 단어가 적합하다고. 에이미는 자기 가방에서 귤을 꺼내더니 나에게 건넸다.
“잘츠부르크로 가요? 그 도시에서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죠.”
역시 배우라서 그런가. 낭만적이었다. 분홍색 하늘을 배경으로 오래전 헤어진 연인이 우연히 마주치고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그 장면의 주인공이 나라면 거절하겠다. 내가 그와 마주하게 된다면,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질질 끌며 유럽의 돌길을 마구 달려 도망칠 것이다. 아직도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잔뜩 모가 난 모습으로는 기적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