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머대디 Aug 09. 2021

나무를 기르며 배운 것들

우리 모두는 세입자이다


세상에 나와 이제 막 일곱 달 정도를 살고 있는 둘째 여름이. 일명 '부스터'에 의존하여 자라던 때이다.

그러니까 작년 오월께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나무 화분 하나가 없었다. 평소 화초나 베란다 텃밭상자를 만들던 나로서는 대단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마트폰을 열어 중고마켓에 들어가 보았다.


마침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고무나무를 단 돈 일만 원에 팔겠다는 게시글을 보았다. 냉큼 눌러 들어가 보니 이게 왜 '일만 원'이었는지 알 만 했다.



우리집에 들여온 기념으로 찍은 사진 속 고무나무 모습.


사진 속 고무나무는 내가 그동안 그림에서 보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쭉 뻗은 굵은 줄기 위로 무성하게 자란 푸른 고무나무 잎새의 싱그러움보다는 거의 다 죽어 가는 마른나무기둥 위로 살아남은 몇 가닥의 줄기와 잎새가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처음 이 나무를 보았을 때 나는 '초라함'을 느꼈다.


하지만 자꾸 마음이 가 닿았다. 냉큼 구매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낸 후 차를 타고 주인집에 찾아갔다. 누구라도 알만 한 아파트였다. 현관문 앞에서 끌려 나온 고무나무는 상당히 값이 나가 보이는 큼직한 콘크리트 사각화분에 담겨 있었다. 나무는 한 손으로도 쥐고 나올 만큼 가벼워 보였지만 이 콘크리트 화분은 어찌나 무겁던지 몇 번을 쉬어 가며 게걸음으로 겨우 집까지 끌고 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나무를 한 번도 키워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렇게 앙상한 고무나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고무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에 사진을 올리고 어떻게 키우면 될지를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대부분 '수형이 볼 품 없어서' 손 대기가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아래 나무 기둥 위로 두 가닥 중 그나마 반듯해 보이는 가지만 남기고 다른 하나는 잘라버리라는 의견도 있었다. 전부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나무 입장에서도 괜찮은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갤러리 전시회장 바닥에 갑자기 드러 눕는 봄. 그걸 따라하는 여름.



어느덧 일 년이 훌쩍 지났다. 봄이는 아이스크림이나 영상 보기를 가지고 아빠를 설득할 줄 아는 협상가가 되었고, 여름이는 그 옆에서 언니가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선 곧잘 따라 할 줄 아는 언니 바라기가 되었다. 지나고 보니 아이들은 저마다의 색깔과 느낌을 가지고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비단 아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고무나무도 어느새 이렇게 훌륭하게 잎새를 내며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일부 고무나무 가지를 잘라 물에 담가 두면 잘린 부분에서 다시 뿌리를 내린다. 어느 정도 뿌리가 자라면 다시 흙에 옮겨 심어 주는 것이다. 고무나무 가지가 또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작은 화분을 지인에게 나눠 주기도 하였다. 그 기쁨이 크다.

물꽂이로 뿌리를 내리면 화분에 옮겨 심어 준다. 장차 멋진 나무가 될 것이다.



재작년 봄 아내와 나는 꽃시장에서 스킨답서스 화분 하나를 사 왔다. 베란다에서 키웠는데 얼마나 잘 자랐는지 모른다. 그 해 겨울, 스킨답서스가 시름시름하기 시작하더니 말라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랗게, 점점 잿빛으로 변해 타버리는 것이다. 물을 줘도 소용없었다. 거의 다 죽어가는 화분을 보다가 줄기 하나를 잡아당겼다. 그냥 뽑혀 나오는 줄기 끝에는 뿌리가 하나도 없었다. 너무 추운 곳에 놔두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뿌리가 몽땅 얼어서 죽은 것이다. 그러잖아도 추워서 어쩔 줄 모르는 식물 위로 얼음물을 부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때가 너무 지나버렸다. 이미 뿌리가 남은 줄기는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남은 줄기 몇 가닥을 모아다가 물꽂이를 하여 집안에 두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갈아주는데 갈아줄 때마다 썩은내가 진동을 하였다. 뿌리는 시커멓게 변하고 나중에는 썩어 문드러졌다. 그러면 다시 깨끗이 씻어내고 새로운 물에 옮겨주길 반복했다. 이듬해 봄 화분에 옮겨 심어 주었다. 스킨답서스는 아주 조금씩 줄기 끝에서 새로운 잎새를 갈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 동안 두 개의 스킨답서스 화분이 자랐다.

올해 왕성하게 자라는 스킨답서스. 누군가는 평범한 화분으로 보이겠지만, 이 녀석들의 처음 모습을 알고 있는 나로썬 볼 때마다 뭉클하다.



몇 년 동안 고무나무와 스킨답서스를 지켜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들도 살아있음을 더 가깝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도 말이다.


나는 코로나19의 원인은 우리의 사랑 없음 때문으로 규정짓고 싶다. 우리의 지나친 탐욕과 이기심이 낳은 것들이다. 눈앞에 있는 생명을 보고도 '생명임을 느끼지 못함' 때문이다. 그 작은 생명들이 사실 나 자신과 다름없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 자신 안의 숨결을 느끼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 마음이 무겁다. 봄 여름이를 볼 때마다 생명의 숨결을 느낀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지구가 숨결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아주 명확하다.


수많은 생명의 숨결이 사라질수록 우리의 숨결도 멈추게 될 것이다.
숲이 사라지면 우리의 미래도 없다.



지구를 돌보고, 숲을 돌보는 일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수많은 가치 있는 일들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 일들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유일한 가치 있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지금 우리는 그 한계선에 다다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집씨통>, 집에서 씨앗 키우는 통나무. 한 알의 도토리가 참나무 숲을 만들 것이라 믿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위기의식을 느껴 왔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난지도 하늘공원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경관에 감탄하지만, 그 공원 어느 곳이라도 삽으로 조금만 파 들어가면 유독가스를 내뿜는 쓰레기가 가득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저 웃을 수만은 없을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땅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모두들 비웃었고, 쓸데없는 짓처럼 보였다. 심기만 하면 말라죽어버리는 나무들을 보고 이 일을 도모한 사람들마저 희망을 잃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희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가능성과 확률을 넘어서는 힘이다. 그것은 1% 만으로도 이미 모든 것을 시작할 이유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들은 희망을 실현해내고 있다.


팬데믹 이후 사람들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동물들이 안전한 숲을 만들면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비대면 시대에 사람들과 함께 숲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중 하나가 '집씨통 만들기'이다. 집씨통은 쓰러진 나무를 재활용 하여 만든 나무 화분에 도토리 씨앗과 흙을 심어 100일 동안 가정에서 싹을 틔운 후 숲으로 옮겨 심어 주는 프로젝트이다.


우리는 모두 세입자이다. 이 지구에 세 들어 사는 존재 말이다. 우리는 햇빛 세입자이며, 물 세입자이며, 공기 세입자이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빌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분명하다.


있는 그대로 되돌려 놓을 것.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무엇인가를 물려줄 자격이 되지 않는다. 이미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 세대가 쓸 것을 우리가 지금 빌려 쓰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되돌려 줄 책임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 모두는 이 일에 동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