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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머대디 Apr 28. 2022

그 길을 가도 큰일나지 않는다

여전히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파커파머의 문장이 내 가슴에 꽂히던 그날의 느낌이 선명하다.


가르침이란 진리에 순종할 만한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파커파머,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중


진리, 순종, 공간, 창조. 이 네 가지 낱말을 만난 것은 나에게 부르심, 일종의 소명과도 같은 강한 인상으로 가슴에 남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추구해야 할 삶,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몇년 후 사하라에서 드림컨설턴트 과정을 밟았다. 그때 나는 이 다시 한 번 문장을 떠올렸고, 이것을 나의 라이프워크( Lifework)로 정의했다. 나 스스로에게 붙인 '공간디자인'이라는 닉네임도 그 때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해갈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도대체 공간디자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공간이 지칭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디자인이라면 어떻게 하는 걸 말하는가? 진리에 대한 순종을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 라는 구체적인 질문 앞에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나는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내 주변에선 그 질문에 대해서 해답을 아주 간단히 냈다. 바로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7년 정도를 여느 목회자들처럼 그 길을 걸어갔다. 목회자로서의 7년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많은 관계 속에 있었고, 여러 사건들과 감정들을 경험했다. 때론 향기롭고 눈물이 났다. 때론 역겹고 역시 눈물이 났다. 그 모든 시간을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또한 목회자의 삶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더더욱 말도 안 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 길이 내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진리, 순종, 공간, 창조 라는 낱말이 내게 의미없어진 것도 아니다. 단지 이런 방식의 길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사실 이런 방식의 길이 아닌 길은 대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목회자를 포함하여) 대부분 대답하기를 어려워 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할 수 밖에 없다. 아닌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길이 의미 없었던 것이 아니라면, 지금까지의 과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었다고 여전히 믿는다면, 여전히 내 안에 진리, 순종, 공간, 창조라는 가슴 뛰게 하는 낱말이 있음을 속일 수 없다면, 도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목사안수를 포기하고 사역을 멈추었다. 2020년의 일이다. 엄밀히 말하면 두번째 멈춤이었고 첫번째 멈춤은 2014년에 있었다. 그 해 나는 아마존으로 단기선교를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한 멈춤의 시간이었다. 이 결정이 어려울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그때 나는 이미 결혼을 하였고, 두 아이의 아빠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그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겐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시간이 찼기 때문이었을테다. 그리고 양가 어른들의 말없는 신뢰와 응원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때마침 터진 코로나로 인해 온세계가 멈추었던 것도 내게 위안이 되었다.


응. 그래 나만 멈출 순 없지. 훗. 대체로 이런 마음이 들었고, 꽤 괜찮은 핑계가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2020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갈 길은 먼데, 여전히 나의 상황은 지지부진, 오리무중 그 자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고 열심히 믿어보고 마음을 다잡아보았다. 때가 되면 언젠가 넘쳐 그 다음 지평이 열리리라! 시간은 흘러 9월이 되었고, 뜨거운 여름 한철을 지나 찬바람이 슬슬 불어올 때즈음 되니 내 마음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아내가 파격적 제안을 한다. 제주도 한달살이를 가자는 것이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이 따로 없다. 모래시계의 모래는 거의 다 떨어져 가는데, 제주도 가서 한달 푹 놀자 오자는 제안이다. 벌이는 전혀 없는데 제주 한달살이 비용으로 몇백은 족히 드는 그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의 결정은 늘 나를 놀라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런 삶을 살아도 큰 일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한다. 아무튼 제주도 한달살이는 매우 뜻 깊었다. 믿음의 도전이었고, 가면 그냥 길이 된다는 아주 단순한 지혜도 배웠다. 백목사님 가정을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를 얻었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후, 도서관에 매달렸다. 오로지 마음 가는 서재로 가서 마음에 들어오는대로 책을 끄집어 들었다. 어떨 땐 수십권의 책을 쌓아놓고 정처없이 페이지 속을 이리저리 해맸다. 그런 시간은 연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자 마치 어둠을 뚫고 들어온 한 줄기 빛처럼 무엇인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빛이 나오는 곳을 파고 또 파들어 갔다. 그제서야 그 빛이 나오는 서재의 분류표를 올려다 보았고, 거긴 ‘농학'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 나는 생태, 자연, 농업, 농사와 관련된 곳에 매달려 있었다. 누가 가라 한 것도 아니고, 알려준 것도 아니다. 그냥 자석처럼, 끌리는 곳에 갔을 뿐이다. 질문과 대답, 질문과 대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거의 최종 목적지라고 판단되는 그곳에서 만났던 것은 ‘퍼머컬처’였다.


퍼머컬처. 영속농법 이라는 뜻을 가진 이 개념은 말 그대로 지속가능한 농법에 대해 말한다. 나는 퍼머컬처를 공부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가 그토록 가슴에 품어왔던 진리, 순종, 공간, 창조 라는 단어를 하나로 꿰뚫어 엮어 낼 수 있는, 그러면서도 내 마음을 매료시키는 것이 분명함을 알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퍼머컬처를 만났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 길을 계속 파고 들수 있게 만들어줬던 계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야곱의우물교회를 만난 것이다. 그 즈음 나는 교회를 위한 이력서가 아닌 '나를 위한 이력서' 한 장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나를 위한 이력서를 겁 없이 냈을 때 연락이 온 유일한 교회가 야곱의우물교회 였다. 그 과정이 너무 드라마틱해서 이 이야기를 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 야곱의우물교회에 갔을 때 담임목사님께서 내게 책을 공부하자는 제안을 하셨다. 그렇게 목사님과 공부하게 된 첫번째 책이 ‘생태요법'이었다. 아주 오래된 번역서 였는데, 교회에서 그것도 담임목사님이, 그것도 다른 어떤 신학책이 아니라, 제자훈련 교재가 아니라, 생태요법 이라는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책을 공부하자는 제안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나는 이 책을 공부하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이 옳다는 생각을 더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야곱의우물교회를 만나지 못했다면, 담임목사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내가 가야 할 길, 그러니까 나만이 가야할 길을 찾아야 하는,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동기와 동력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든든히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밀어주고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 지지와 응원 속에서, 더이상 숨거나 감추거나, 혹은 일에 파묻혀 어디로 가는지 생각할 겨를 없이 지내지 않을 수 있었고, 서서히 걸음걸이에 속도를 붙일 수 있었다.  또 한가지 감사한 것은, 야곱의우물교회에 와서야 평안한 마음으로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이십대와 삼십대 대부분을 차지했던 나의 길.. 그래서 더더욱 내 가슴에 응어리처럼, 구두속의 돌멩이처럼 괴롭혔던 이 문제가 샬롬 가운데 지나갔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제 시작이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여전히 갈 길이 멀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길이 잘 닦여져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주변에 아무도 이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아내에게도 말이다. 오로지 혼자 길을 찾아 해맸고 하나하나 고리를 엮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증거라고는 오로지 직감. 그것 하나 뿐이었다. 많은 정보를 모으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며, 실제 그런 삶을 구축하기 위해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겐 먼 이야기 같아 보였다. 그러나 앞으로 1년 반, 그러니까 봄이가 초등과정에 입학하기 직전까지 우리 가족의 삶에 아주 큰 결정을 하나 해야 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바로 시골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다.


이 결심이 가능하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나의 오래된 생각이기도 했지만, 잠정적 결론을 내기 쉬웠던 이유는 아내 덕분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내는 살면서 단 한번도 경제적 걱정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리고 언제나 시골로 가는 것을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텃밭에 가면 우두커니 서 있거나 딴청을 피우는 것 일색인 아내가 시골로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고, 사실 귀농귀촌 실패의 전형적인 케이스 이기도 하여 걱정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아내의 이런 근거없는 자신감이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나에게 도움이 될 때가 많다.


2022년 4월 4일 아침, 하루가 시작되자마자 아내가 엄청난 제안을 해온다. 제주도 한달살이 가 아니라 고흥으로 아예 살러 가자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열심히 근거를 댄다. 그 근거를 쭉 듣고 있자니 여전히 내 마음엔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휘발유에 붙은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아내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그 근거를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이틑날 4월 5일, 부지깽이도 묻으면 싹이 난다는 식목일 이른 아침, 나는 군대 들어가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전남 고흥으로 내달렸다. 400km, 한번을 쉬지 않고 내리 4시간 20분을 달려 고흥에 도착한다. 일단 계획 없이 이리저리 걷고 또 걸었다. 길에 어르신들도 만나고, 청년 카페사장님과 베이커리 사장님도 만난다. 군청에서 귀농귀촌 관련 신청서를 제출한다. 제출하고 나오면서 도대체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싶다. 다시 사백 몇킬로를 달려 집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넘는다.


며칠이 지났지만, 하루에도 수백번을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 여전히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지의 세계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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