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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머대디 Oct 09. 2022

고흥살이 시작

괜찮지 않음이 괜찮아지는 것

고흥에 온지 두 주가 지난다. 

하남에서의 마지막을 묘사하자면 가히 ‘야반도주’라 할만하다. 아이들이 갑자기 폐렴과 장염으로 일주일 이상 아파 어린이집에도 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집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하남에서의 갈무리를 차분히 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고, 불필요한 짐들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했다. 이사 당일 아침 우리 집은 이사 직전의 집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평소의 모습 그대로 였고, 이사짐 사장님은 그런 우리 집의 상태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사짐 인부들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 나는 탁상 위의 그릇들을 막 설거지 하고 있었으니까. 서울에 올라와 대학생활하며 열번도 넘게 이사를 했고, 결혼하고 다섯 번의 이사를 해봤지만 내 생전 이런 이사는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우리의 도시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대신 보여준 것이라 본다. 아내는 하남을 떠나기 전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만나야 한다며 계획을 세웠다. 사실 내게 있어서 그 모습은 상당히 불편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시골로 터를 옮긴다는 것 자체가 단순해지기 위한 시작일 터인데, 그 시작을 위한 우리의 모습은 단순과는 거리가 먼, 매우 분주하고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어찌 고흥에 내려왔다. 포장이사를 했지만 눈앞에 놓여 있는 모습은 화물만 옮겨놓은 상태 였다.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입주청소라는 것도 큰 맘 먹고 하였지만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을 정도로, ‘티’가 나지 않았다. 이사 온지 2주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한쪽 방은 널부러진 짐으로 가득하다. 고흥에 오기 전에 우리가 겪는 불편 중 꼭 해소했으면 했던 것이 설거지 였다. 다섯 식구의 설거짓거리가 늘 가득했고 설거지 시간도 상당했기 때문에 꼭 식기세척기를 들이겠다고 마음 먹었다. 전주 엄마와 이귀자 권사님은 반드시 건조기를 사야 한다고 신신당부 하셨다. 식기세척기와 건조기. 이 두 가지 신문물은 우리의 일상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임에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두가지 모두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마음이 바뀌었냐구? 아니지. 아예 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기에 접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화물만 옮겨 놓은 듯한 포장이사, 오자마자 셀프 입주청소를 하게 만든 입주청소, 기대했던 신문물의 포기... 지금에 와서 보니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 같이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여기에 내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우리의 삶에 출발 지점이란 게 있다면,

우리가 바라던 것은 마이너스의 삶이 아닌, 적어도 출발 지점으로부터 우측 어딘가를 지나는 삶이었을 것이다. 시골로 터를 옮기는 삶은 그 소망의 시작이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애써 준비해 왔던 여러 사건들은 오른편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꼴이 되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다시 출발 지점. 제로의 상태일지 모르겠다.


“여기에 내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사건들이 내게 질문한다.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다시 제자리. 내가 서 있는 곳이 제자리라는 걸 발견하는 순간 들려오는 그 질문. "여기에 내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사건들은 나에게 다시 처음부터 고민해 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어쩌면 시작부터 잘못된 건 아닌지 다시 되돌아 보라는 의미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무척 감사하다. 이 모든 바람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휩쓸고 간 게 아니라는 사실에. 적어도 처음 그 상태 그대로 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본전은 건졌다! 이 사건들이 내게 주는 선물이다.


“여보 식기세척기며 건조기를 안 산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아내는 고흥 온지 2주일이 되자 이렇게 말한다. 나 역시 동의한다. 그렇다. 우리에겐 그런 것들이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그런 것들이 없어도 괜찮다! 삶은 여전히 쓸고 닦아야 할 일이 많은 법. 도시에서는 너무나 당연했던 편리한 것들이, 이곳 시골에선 찾아볼 수 없는 현실, 당황스럽긴 하지만 괜찮다! 괜찮지 않음이 괜찮아지는 것. 그제야 한발자국 오른편에 내딛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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