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도시, 싱가포르(3)

도심 속 녹색 판타지, 싱가포르시티

by 썸머그린
singapore ⓒ 2020 green.



센토사 섬에서 뜨거운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이동하였다. 오늘은 낮과 밤이 다른 싱가포르 최대의 유흥가, 클락키로 떠난다. 클락키 주변의 차이나 타운에 위치한 숙소에 머물 예정이라 짐을 옮겨두었다. 차이나타운 근처여서 골목 안쪽으로 한자로 써진 간판이 꽤 보였다. 육교를 건너며 도로를 내려다보면서 티끌 한 점 볼 수 없는 깨끗한 길이 참 좋다.


오래전 무역의 중심지였던 클락키는 쇠퇴하고 강물의 오염이 심해져 정부의 강변 정화사업으로 재개발되어 지금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곡물과 향신료를 보관하는 오래된 창고를 레스토랑과 클럽, 노천카페로 변화시켰다. 아침에 가니 파스텔톤으로 칠해진 예쁜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의 레스토랑에 야외 테이블이 있어 강을 보며 식사할 수 있는 운치 있는 공간이다. 우린 그린티 라테 한잔을 마시며 산책을 했다. 유흥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낮의 클락키는 평화로웠고 분수대 근처에 재즈바와 다양한 콘셉트의 술집이 즐비했다. 밤이 되면 강변 주변으로 불이 켜지고 음악이 흐르며 리버크루즈가 다니는 화려한 야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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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 근처에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자연친화적인 건물이 눈에 띄었다. 벽면을 타고 주렁주렁 늘어진 열대 식물들이 건물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 녹색공간은 파크로열 호텔이다. 건물 외벽의 식물이 실내공기를 낮추고 내부 곳곳에 있는 정원이 공기청정기 역할을 한다. 도심 한가운데의 건물 속 숲이 들어선 것 같다.


점심으로 여행 첫날부터 기다렸던 초밥을 먹으러 갔다. 굴과 모둠회를 시켜서 너무 맛있게 먹었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다. 펄펄 열이 나고 으슬으슬 오한이 들었다. 굴을 먹은 탓에 노로바이러스에 걸린 건지 그냥 피곤한 건지 한국처럼 쉽게 병원을 못 가니 답답하게 느껴졌다. 배탈이 심하고 멍든 것처럼 몸이 너무 아파서 비상약을 챙겨 먹고 방에서 앓아누웠다. 얼마나 잤을까 굵은 장대비 같은 스콜이 쏟아져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나를 챙겨주던 언니가 힘없이 늘어져있었다. 하필 좋은 호텔에서 묵다가 마지막 밤인 오늘 예산에 맞춰서 작은 방으로 옮겼다. 환풍기도 없고 창문이 없는 어두운 방에 우두커니 있는 모습이 우울해 보였다. 다행히 자고 일어나니 열이 내리고 몸이 가뿐했다. 하루 종일 나를 간호하느라 애쓴 언니를 위해 서둘러 첫날 묵었던 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문제의 맛있는 음식들


운 좋게 방이 업그레이드되어 둘 다 들떴다. 짐을 내려놓고 근처 래플스 시티 몰에서 베쓰 밤을 사 와서 목욕물을 받았다. 연분홍색 거품이 뭉게뭉게 올라오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여행을 갈 때면 시간별로 재밌는 일정표를 만들어주는 시계토끼 같은 언니가 있어 정말 좋다. 내 인생 최고의 가이드다. 짧은 여행 중 아프고 지나간 하루가 아쉽지만 오늘도 행복한 하루였다. 화장실에서 보이는 통 유리창에 싱가포르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밤 화려한 불빛들이 눈을 끌었다. 싱가포르의 야경은 밤하늘에서 떨어진 별처럼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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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을 보니 눈을 감기가 아쉬웠다. 오늘 밤은 조금 더 늘어나서 이대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도 오랜만이었다. 바쁜 일상에 치여서 주말만 기다리며 보내는 의미 없는 하루와 비교되었다. 월트 디즈니의 명언처럼 행복함이란 항상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걸 감사하고 소중히 여길 때 생겨나는 것. 해외여행에 와서가 아니라 오늘 하루가 소중했다. 평소에 자주 아프지만 혼자 있거나 그냥 지나가는 날들이 많다. 아플 때 진심으로 나를 아껴주고 챙겨주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로 고맙고 특별한 날이었다.


푹 자고 일어나서 처음으로 룸서비스를 시켜봤다. 오렌지주스와 스크램블 에그 소시지와 크로와상 한 개를 야무지게 먹었다. 호텔 수영장을 구경하고 바깥 창문으로만 보이던 붉은 지붕의 차임스에 가보기로 했다. 19세기에는 성당과 수도원 그리고 여학교였던 차임스는 분위기 좋은 식당가로 개조되었다. 뾰족한 첨탑과 직선적인 느낌이 드는 유럽풍 고딕 양식 건물이었다. 자세히 보니 하얀 벽 위로 정교한 석고 장식이 보였다. 안뜰로 들어가니 녹색 잔디밭 위에 빈백이 여러 개 놓인 모습이 평화로웠다. 멀리서 볼 때는 고딕 양식 때문에 딱딱하게 느껴졌는데 나무와 가게 주변에 작은 조명들이 달려있어 저녁에 오면 로맨틱한 분위기일 것 같다.



LA 여행에서 제일 맛있게 먹었던 boiling 크랩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도착해서 봉지 크랩과 옥수수, 진저에일을 주문했다. 한입 베어 물자 중독성 있는 매콤하고 짠맛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맛있지만 너무 짜서 머리가 띵해지는 맛이다.


식당에서 나와 마리나 샌즈 베이 몰 근처에 위치한 식물원, 가든 바이 더 베이로 걸어갔다. 첫날 저녁에도 슈퍼트리 쇼를 보러 갔지만 낮 풍경도 궁금했다. 사람이 북적였던 밤과 달리 푸릇푸릇한 슈퍼트리는 더 크고 울창해 보였다. 슈퍼트리들 가운데에 있는 더 큰 슈퍼트리 그로브에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6층 높이에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싱가포르에 산다면 주말마다 산책하러 오고 싶은 곳이다. 먼저 카트를 타고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정글에서 볼법한 다양한 열대식물들이 인공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나무집과 물놀이 시설도 있다. 누워있는 하얀 대형 아기천사 동상이 잔디밭 위에 둥 떠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조각품이 있었다.


가든 바이 더 베이에는 커다란 유리 돔 안에 실내 정원이 있다. 세계 최대 규모로 32000개의 식물을 보유한 플라워 돔과 클라우드 포레스트 돔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낯선 식물들이 많아서 재미있었다. 돔에서 나와 슈퍼트리 옆을 걸어 다녔다. 식물원 너머로 보이는 높은 빌딩들과 어우러진 슈퍼트리들의 모습이 아름름답다. 유럽여행에서 아름다운 성과 인공적인 정원을 많이 봤지만 가든 바이 더 베이는 정말 특별하다. 상상력을 끌어올려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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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로빈과 곰돌이 푸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서 캐리어를 챙겨 창이공항으로 돌아갔다. 꿈같던 며칠간의 싱가포르 여행이 끝나서 아쉬우면서도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었다. 도착할 때는 밤이라서 몰랐는데 창이공항 안에 거대한 인공폭포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폭포라고 한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들이 화려한 빛깔의 조명을 받아 반짝거린다. 가까이서 보니 폭포의 높이와 떨어지는 물에 압도되었다. 인공폭포를 주변으로 울창한 나무와 동그랗게 벽면을 따라 식물들로 조성되어 있다.


방금 실내정원에 갔다 왔는데 다시 가든 바이 더 베이의 돔으로 들어간 기분이다. 반짝이는 불빛과 식물들 그리고 유리천장과 쏟아지는 폭포수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공항 안에 있는데 공기가 좋아서 정말 숨 쉬는 게 편해서 기분이 좋았다. 공항 안에 쇼핑몰과 식당가가 있는데 유명 맛집은 다 가져다 놓은 느낌이다. 정원 위층에는 미로와 미끄럼틀, 천장 위에 설치된 그물망을 걸을 수 있는 어트렉션도 있고 근사한 바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여러 공항을 가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공항은 처음이다. 창이공항을 여행 일정에 넣어 하루 종일 구경을 해도 될 것 같다. 자연친화적이지만 인공적으로 꾸며진 독특한 싱가포르의 도시미관이 머릿속에 박혔다. 마지막 여행지지만 코로나가 풀리면 꼭 다시 가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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