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로 기차를 타고 떠나는 낭만여행
누군가에게 길들여지면서 익혀진 습관들은 잊을 수 없다. 처음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드라이브를 가고 함께 무언가를 했던 추억들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게 되지만 그날의 온도, 냄새 같은 어떤 말랑한 기분에 문득 떠오르게 된다. 태어나자마자 본 생물을 엄마라고 기억하는 동물의 각인효과처럼 스무 살의 추억들이 마음속에 콕 박혀있다. 도시의 수많은 불빛에 까만 밤이 아닌 옅은 어둠이 깔린 밤하늘을 함께 본 것도, 서투르던 눈썹 정리를 하게 된 것도 벚꽃이 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그 아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며칠 전 병원에 가기 위해 기차에서 졸다가 고개를 떨궜다. 머리가 여기저기 부딪히다 잠에서 깨며 다정하게 어깨에 내 머리를 올려주던 너의 손이 생각났다. 집에서 쫓겨나서 우는 나를 달래주며 함께 내일로 열차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어렸고 막무가내였다. 뭐든 재지 않고 일단 해봤다. 무작정 전국 여행을 가자고 일곱 시간 무궁화호를 타고 청량리에서 동해로, 동해에서 대구로 다섯 시간이 걸리고 또 대구에서 여수로 기차만 주야장천 탔다.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끝없이 재잘거렸다. 돈이 없어 숙소 대신에 밤기차 안에서 어설픈 잠을 잤지만 즐거웠다. 낭만은 부족할때 더욱 잘 느껴진다.
동해에 가서 내렸는데 시골에서는 카드를 안 받는 사실을 몰랐다. 내 주머니에 든 칠천 원이 전부였던 며칠간의 여행은 참 신기했다.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가까운 식당에 가서 라면을 한 그릇씩 먹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을 쓰고도 이상하게 걱정이 안 되었다.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고민하다 불교도 아닌데 조용한 곳에 가고 싶다며 친구는 인터넷으로 템플스테이를 신청했다.
쓰지 못하는 카드와 시내로 나오는 왕복 버스비만을 가지고 예상치 못하게 동해에 있는 산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같이 절에 가서 승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은 모습이 어설펐다. 사찰에서 나는 나뭇조각이 타는 향을 맡으며 온갖 잡다한 생각이 재가 되어 사라지길 바랬다.
자취하니 귀찮아서 하루에 한 끼만 먹고 과자로 대충 때우던 내게 절밥은 아주 맛이 좋았다. 둘 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먹고는 눈이 번쩍 뜨였다. 며칠 동안 사찰음식에 매료되어 식판에 점점 더 많은 음식을 푸기 시작했다. 절에서 나올 때에는 3킬로씩 쪄서 배가 포동포동 나왔는데 그것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다.
저녁이 되자 백팔배를 하며 묵주를 만들었다. 절을 한번 할 때마다 동그란 묵주 알을 줄에 끼워 넣었다. 집에서 나올 때는 마음이 어지러웠는데 몸이 지치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저녁이 되자 작은 절방에 침구를 깔고 둘이 누웠다. 도시처럼 불빛이 없어 금방 어둠이 깔리고 산속엔 까만 고요함만 맴돌았다. 한지로 발라진 나무 문 한 겹이 방과 밖을 가르고 있었다. 현관문을 육각 자물쇠로 꼭꼭 잠가도 무서워하던 쫄보인데도 낯선 잠자리가 편안했다. 왠지 모르게 여긴 안전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스르르 잠에 들었다.
끼익- 아침에 네가 문을 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같이 법당으로 갔다. 명상시간 동안 거의 졸다가 밥을 먹고 마루에 누웠다. 따스한 햇살과 바람이 간지러웠고 마당을 쓰는 스님과 스님을 따르는 개 한 마리가 보였다. 바쁘고 시끄럽고 벅차던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에 쉼표를 찍는 것 같다. 여기선 모든 것이 단출했다. 무엇을 먹을지, 입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급하게 해야 할 일도 없다. 정해진 시간에 함께 수행하고 감정이 부딪힐 일도 없다.
낮시간에는 말없이 걷는 스님 뒤를 따라서 사람들과 함께 줄을 지어 산길을 걸었다. 푸르른 여름날, 하얀 고무신을 신고 흙길에서 저벅저벅 같이 걷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새소리, 향긋한 숲 내음이 기억난다. 스님을 따라가 다 같이 계곡 위의 바위에 앉아 명상을 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점점 머리가 맑아진다. 절로 돌아올 때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돌아와서 축축한 바짓단을 접고 물기를 털어냈다. 은은하게 촛불이 밝히는 어두운 저녁 법당에서 만다라를 그렸다. 쏴아- 빗소리를 들으며 쓱쓱 칠했다. 조용한 가운데 우린 서로의 그림을 보여주며 눈짓했다.
우연히 우리가 간 날 방송 촬영을 하게 되어 예정에 없던 다도까지 하게 되자 더욱 재밌어졌다. 마지막 날 새벽에 세시에 일어나서 본 해변에서의 일출까지 모든 게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차분한 절향이 어른 아이 같던 마음속 혼란을 다 태웠을 때쯤 우리도 산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까마득하게 잊은 여름날이 이따금 떠오른다.
스무 살이 지나고 스물한 살, 스물두 살은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 시간은 점점 빨리 가고 그저 스무 살 이후로 기억될 뿐. 알 수 없는 불안과 자유 속에서 혼란을 겪고 모든 게 처음이라 신기했던 나의 스무 살이 가끔 그리워진다.
이미지 출처: 영화 '언어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