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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할 의무, 불행할 자유

-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를 읽고

by 황여름




밸런스 게임을 해보자. “자유롭고 불행할래? 단 네가 불행한지는 몰라. 아니면 억압받고 행복할래? 단, 네가 억압받는지는 모르고”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는 말그대로 ‘쿨’하고 ‘멋있는’ 것들로 가득찬 세상이다. 우울, 고민, 스트레스는 금기되어 있고 마치 내가 좋아하는 돌싱 예능인 돌싱글즈처럼 “규칙은 하나. 사랑(행복)에 빠지세요!” 라는 슬로건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복에 대한 의무감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우울이나 고통이 느껴질 경우 즉시 소마(멋진 신세계 속 마약)를 복용한다. 병에서 태어난 이들이니 ‘가족’이 없다. 부모 자식 간의 갈등도, 재산 문제로 형제와 다툴 일도 없다. 제사도, “애는 안 낳니?” 하는 오지랖도 없다. 출산과 양육이라는 책임에서 인간이 해방된 만큼, 전통적인 가족 관계 역시 의미를 잃었다.


학교에서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필요한 지식은 자는 동안 세뇌되고, 사회에서 맡은 역할은 철저히 설계된 계급 안에서 안정적으로 수행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 죽음이 가득한 병실은 그저 쾌적하고 향기로운 공간이다. 멋진 신세계에는 고통이 없다. 아니, 고통을 느낄 수 없게 설계되었다.

반면, 우리가 사는 현실은 불안정의 연속이다. 경쟁, 비교, 우울, 죽음 등 고통을 주는 것들이 가득하다. 문득 내가 살아오며 겪은 불안과 슬픔, 기쁨과 행복을 떠올려봤다. 슬펐지만 ‘바닥을 찍었으니 좋아질 일만 남았어!’라는 희망이 있었고, 기뻤지만 ‘과연 이 행복이 오래갈 수 있을까’하는 불안이 따라왔다. 그리고 가족, 친척들의 오지랖과 잔소리에 지지고 볶으며 열심히 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족과의 행복한 기억이 많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 인간의 감정이란 결코 하나로 구성될 수 없는 것이지.


멋진 신세계에서의 행복은 고통의 부재다. 이는 쇼펜하우어적 사고로 행복은 욕망이 충족될 때 느껴지는 일시적인 해방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 ‘행복=고통의 부재’가 맞을까? 인생을 살아보니 안정감이 불안을 줄 수도 있었고, 힘들지만 행복할 수도 있었다.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복잡함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인이 봤을 때 나는 야만적이고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고통스러워도,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하고 느낄 수 있는 삶이 더 인간답다고 믿는다. 버나드가 말한 것처럼 비록 비참할지언정 이대로의 내가 좋다. 야만인 존과 같이 행복할 ‘의무’보다, 불행할 ‘자유’가 있는 인생. 그게 진짜 인간이 아닐까.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오, 멋진 신세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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