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세상의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것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를 읽고

by 황여름

소설가 알베르 까뮈의 명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있다. “You cannot acquire experience by making experiments. You cannot create experience. You must undergo it.”


나는 대학시절부터 늘 “난 경험주의자야”라는 말을 해왔고, 남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생각해보니 살아가며 해본 통일성 없는 나의 행동들 이것, 저것을 “경험주의자”라는 말로 멋지게 퉁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 나는 여전히 경험주의자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바뀐 게 있다면 이번에는 나의 혼돈의 결과물을 멋지게 포장할 수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슴 속에 담긴 경험의 파도들. 넘치기 일보 직전인 감정의 파도들, 알 수 없는 가슴 속 울렁거림이 싯다르타를 통해 깨달음으로 바뀌었다.


어린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는 진리를 찾아 가족을 떠났고, 사문의 삶을 거쳐 도시에서 부와 쾌락을 맛보며 타락하기도 한다. 강물에 몸을 던지고 싶은 절망의 순간, 그는 뱃사공 바주데바와 함께 강물 에서 뱃사공으로 새로운 삶을 산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선과 악, 어리석음과 깨달음, 혐오와 사랑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 안에 공존한다는 것을. 그 깨달음은 오직 바닥과 정상, 어둠과 빛을 모두 지나온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임을.


한때 나는 고빈다처럼 성실하고 모범적인 삶이 정답이라 믿었다. 그런 사람들이 현명하고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성실하게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니까. 나는 왜 그들처럼 살지 못할까 고민하고 자책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싯다르타를 통해 알았다. 모든 경험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을 말이다. 죽음이 있다면 태어남이 있고, 미움이 있다면 사랑도 있다. 뉴스 속 비극과 기적이 공존하듯, 내 안에도 선함과 악함이 같이 있다.


내 인생의 밑바닥이 없었다면 일상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동네에 산책하며 쉽게 만날 수 있는 새들의 지저귐을, 산책하는 복돌이의 귀가 살랑거린다는 것을 알 수나 있었겠는가.


결국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단 하나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관찰하고, 경외하며, 사랑하는 것.


아직 내 인생이 절반을 지났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이제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살고자 한다. 때때로 세상이 혐오스러워 강물로 뛰어들고 싶은 날도 있겠지만, 그 강물조차 나를 품을 것이다.






싯다르타를 처음 읽은 것은 2020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이 세번째 완독이다. 싯다르타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튀어 올라 매번 다른 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이번에야말로 가슴 속 깊이 싯다르타를 이해하게 되었다. 또 몇 년 뒤에 나는 다시 읽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어떤 깨달음을 얻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파도는 바다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