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하지만, 여전하여서
겨울의 마지막 절기인 대한, 그 하루 전날 아침. 밤새 눈이 잔뜩 쏟아진 모양이다. 하얗게 빛나는 세상에 눈이 부시다. 겨울나무들이 오늘을 위해 특별한 옷으로 갈아입은 양 아름답다. 바람이 불어드니 나무 위에 앉았던 눈꽃이 날아오른다. 겨울눈이 쌓인 침엽수들은 꼭 쑥 버무리 같다고 여겨져, 따뜻하고 폭신한 감각이 연상되며 눈길을 잡는다. 소나무나 전나무, 가문비나무의 가느다란 잎에 소복한 눈가루가 보드라워 보인다. 오늘 아침 마주한 단풍나무는 특유의 서정적임을 그대로 간직한 채 붉은 수간 끝으로 하얀 눈과 가만히 어우러져 있다. 벚나무가 심긴 도로를 지날 때는,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단 생각을 했다. 봄에 하얀 화관을 쓴 벚꽃 나무를 마주하는 일은, 바람에 흐트러지는 꽃망울들의 부드러운 선율을 보는 건 황홀하다. 초록의 벚나무 잎들은 씩씩하고 싱그러우며, 가을의 그들은 가지 끝에 애플 망고라도 단 듯 그 잎에 드리운 초록과 빨강, 노랑의 경계가 예쁘고 또렷하게 어우러져 감동 그 자체였다. 그리고 겨울, 앙상하게 잔가지를 뻗고 선 자태가 고요하던 한 날에, 쏟아져 내린 눈을 그대로 입고 뽐내는 아름다움이란.
겨울에 머무는 동안에 나는, 겨울을 가장 사랑하게 되고 만다. 다른 어떠한 계절들을 그리워하거나, 어떠하면 좋겠다는 다른 계절의 일면을 떠올리기보다는 그저 겨울 자체로 매일을 좋아한다. 추운 날엔 공기가 차가운 만큼 대기가 맑아 좋고, 이따금 햇살이 따뜻한 날엔 반가운 기분이 든다. 눈이 내리면 아름답고, 눈이 없어도 겨울이란 계절은 낭만으로 가득하다. 달콤한 군고구마도, 손 끝에 배인 감귤향도, 긴긴밤을 예쁘게 수놓는 반짝이는 조명들도, 크리스마스도, 겨울의 한가운데에 소한이 든 것도, 대한의 끝에 올 입춘도, 나에겐 몽땅 낭만이다. 물론, 여름이면 도리없이, 내 편애는 영원히 여름에 종속된 듯 굴 테지만. 지금은 겨울이 좋다.
명랑하던 시절, 나는 글 쓰는 게 즐거웠다. 나의 어느 조각을 꺼내 풀어내도 다정하고, 따뜻한 글이 쏟아졌다. 어두운 나를 잘 숨겨두고, 유려한 면 만을 근사하게 포장해 꺼냈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소모적이고 동시에 감정적이며, 냉소적이면서도 선험적인 행위다. 글에는 결국, 많은 내가 담긴다. 그걸 깨달은 뒤로는 글쓰기가 두려워졌다. 기록이 남겨지는 일이, 그 행위 자체가. 내가 가장 사랑하던 나 자신을, 내 생각을, 내 마음을, 내 시선을 보여주는 기록이 세상에 남겨지는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오판이나 오해에도 한마디 항변할 수 없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의 내가 벗어 놓은 나 자신 같아서. 그런 걸 세상에 꺼내는 게 새삼스레 겁이 났다. 그래서 작년 봄, 작가승인을 받고 조금씩 글을 쌓았던 브런치를 충동적으로 지웠다. 글은 휘발 되었고, 물리적 방어태세로 글쓰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새 해가 되었지만, 나는 아무런 계획이나 목표 같은 걸 갖지 않고. 그럼에도 착실히 하루하루를 많이 웃고, 명랑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그 편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불안하고, 이따금 불행하며, 스스로 고대하는 근사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에 본격적인 무언가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들끓는 글 쓰기를 향한 욕망이 살아나는 순간들은, 내가 쓴 글을 다시 읽게 됐을 때다. 아직도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는 병렬의 문장들, 수동태의 형태를 띈 지난한 과거의 기록은 자꾸만 내 안에 풀무질을 해댔다. 기어코 꿈틀꿈틀 뻗어나간 지하경의 숨은 줄기들은 나 자신에게 물었다. 글쓰기에 본격적일 필요 없이, 그저 심상한 기분으로 연속해 보는건 어떠냐고 말이다.
대한을 하루 앞두고, 두번째 브런치 작가 승인 알람이 왔다. 아, 지금으로서 내가 바라는건 단지. 경계 없이 연결되는 글쓰기의 연속, 그 뿐이다. 연속됨과 연결됨이 함께하는 이 한 문장이 올해를 대변할, 내가 생각해 낸 최선의 키워드이다. 브런치에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면, 하고 가만히 생각했을 때. 연속성과 연결됨에 대해, 그리고 절기와 계절에 대해 적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지척에 머물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글을 쓰다 보니. 조금은, 기존에 '나'에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그리운 나 자신에. '다시' 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내내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