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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롱 Oct 15. 2021

오늘은 크림 대잔치

르꼬르동블루 마드리드 제과 실습 1

초급 제과 코스는 총 3반. 반에 따라 일주일에 두 번이나 세 번 등교를 하게 된다. 한번 가면 3시간의 데모 수업과 3시간의 실습수업을 한다. 스페인어가 아직 조금 부족한 나는 영어 수강을 신청했고 그래서 동시 통역사가 있는 A반으로 배정이 되었다. 영어만 한다면 르꼬르동블루 코스를 마드리드에서 하는 것은 조금 어려울 수 있는데 그건 데모 수업에만 통역사님이 계시기에 실습 시간은 도움 없이 온전히 자기 힘으로 셰프님과 소통하고 주어진 과제를 해내야 하니까 말이다. 그동안 두 번의 실습을 다녀왔고, 두 번 다른 셰프님을 만났는데 두 분 다 프랑스분이셨다. 프랑스어는 물론 영어도 스페인어도 잘하시지만 전체 공지를 스페인어로 하시기에 기본 스페인어는 필수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하게 된 만큼 '열심히 해야지' 다짐했지만 생각보다 예습과 복습은 쉽지 않았다. 학교에서 받은 커다란 가방에는 칼 세트와 제과 기본 준비물인 스페출러, 붓, 거품기, 자 등이 잔뜩 들어있어 상당히 무거운데, 매번 필요한 것들을 확인해서 단출하게 가져갈까도 생각했지만 혹시나 빠뜨려서 수업에 차질이 생길까 봐 감히 엄두도 못 냈다. 새로 만들어볼 것이 무엇인지 각 재료의 영어명과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잘 확인하고 시작하면 좋을 텐데! 그래서 데모 수업을 들을 때 내가 어떻게, 어떤 순서로 작업할지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참여하면 더 집중이 될 텐데 싶다가도 엄마라는 본캐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은 이미 흘러 새벽에 일어나 집을 나서기 바쁘다.


데모를 보여주시는 브라질 출신의 아만다 셰프님은 운동과 인스타그램을 아주 열심히 하실 것 같은 수려한 외모를 지니셨다. 광채가 마스크를 뚫고 나올 정도인 데다 펑퍼짐한 조리복을 입으셨는데도 모델 같다. '같은 여자가 봐도 멋지다. ' 마음의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금세 셰프님 손에 집중했다. 셰프님이 해주시는 이야기가 귀를 강타한다. 심장 뛰게 하는 일을 하러 온 만큼 최선을 다해보라고. 오늘도 열심히 해보자는 말에 정신을 다시 바짝 차려본다.


오늘은 크림을 만드는 날. 빵과 케이크 안에 듬뿍 올라간 크림, 타르트 충전물로 얇게 발라진 크림, 아이스크림의 베이스가 되는 크림 등. 크림은 그냥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섬세하게 온도를 조절하고 아무거나 막 휘젓는 것이 아니라 농도에 따라 젓는 속도를 달리하고 딱 알맞은 텍스처로 만들기까지 집중해야 한다. 향도 중요하다. 계란을 잘못 조리하면 자칫 아기토 냄새까지 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갑자기 싱가포르 백화점 지하에서 났던 토 냄새가 떠올랐다. 아! 그곳의 두유&크림 전문점에서 나는 냄새였다고 어설프게나마 추측해볼 수 있었고 십여 년 전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


데모 수업 때는 몰랐는데, 실제로 만들어보니 똑같이 만드는 것 같아도 결과물이 천차만별. 모든 게 쉽지 않다. 손으로 하는 일인 만큼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은 일을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표현하는 시간이 아니고, 한눈에 봐도 정확하게 만들었다고 결과물로 보여줘야 한다. 수업시간에 종이에 뺵뺵하게 적어둔 유의사항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했지만 다 만들어두고 보니 조금 부족해 보인다. 제과는 과학이라는데 다시 해볼 때는 더 정성을 기울여서 정확하게 해 봐야겠다. 한순간 불 조절의 실패로 묽어야 할 크림 하나가 몽글몽글 뭉쳐버렸다. 크림 표면처럼 잔잔했던 내 마음에도 변화가 절로 생겨난다.  


수련이 더 필요하다고 우울해지려는 찰나 이곳에 잘 왔다는 생각이 머리를 강타했다. 무엇보다 정말 재밌어서!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게 이런 기쁨을 선사하는구나. 아기들이 매일 말하는 "엄마 이거 정말 재밌어요. "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달까. 폰 중독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말에 이렇게 경청할 수 있다는 것. 하루 종일 무엇인가 집중해서 할 수 있다는 것. 특히 이건 손으로 하는, 노동력을 많이 투입해야 하는 일이어서 더 그런 것 같다. 특히 샹티 크림 (휘핑크림)을 손으로 거품 칠 때는 제발 얼른 끝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만큼 팔이 아팠는데, 나름 고생해서 공기가 잔뜩 들어간 부드러운 크림이 완성될 때는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적당한 질감의 크림은 설탕을 많이 넣지 않아도 너무나 부드럽고 달콤했다. 단맛의 완성은 복합적인 것이었다. 설탕을 퍼붓는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달까. 크림은 우리의 인생과 너무나 닮았다. 달콤한 재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때로 거칠게 세차게 휘저어야 그 맛이 난다.


오늘의 전리품으로 크림 4통을 얻었다. 그냥 퍼먹기도 하고, 일부는 빵 반죽을 해서 크림빵이 되었고, 하나는 냉동실로 들어가 아이스크림이 되었다. 스타벅스를 가면 늘 크림을 잔뜩 올려달라는 아랫집 프랑스 언니가 생각나서 일부는 귀여운 잼통에 담아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크림으로 뭘 하지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크림은 이틀 만에 끝이 나버렸다.


다음 시간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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