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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럽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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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롱 Dec 04. 2020

기대치와 만족감의 상관관계

인생 스테이크를 만나다

마드리드에서 차로 1시간 즈음 달리면 톨레도라는 중세 도시를 만날 수 있다. 직선으로 쭈욱 쭈욱 큰길이 뻗어있고 고층 건물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수도와는 달리 톨레도는 중세의 매력을 가득 간직한 곳이다. 카스티야 왕국의 옛 수도라는 이곳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서 구불구불한 돌길에 오래된 성벽으로 이전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 게다가 요새여서 물길로 둘러싸인 모습 덕에 한 발자국 떨어져 근처 동산에서 보아도 아름답다. 스페인에 살게 된 지 1년 반도 지났는데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하니 오히려 주위에서 안타까워했다. 절경이라 꼭 보고 와야 한다나. 게다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모두 그곳에 가서 파라도르 호텔을 들러 경치를 감상하며 커피를 마셔야 한단다. 아울러 일몰까지 볼 수 있으면 최고라고. 대성당도, 미술관도, 유명 음식점도 아니라 호텔 커피? 다들 추천하는 그 코스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도착한 파라도르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스페인어로 MIrador(미라도르)는 전망대인데 이곳은 호텔이면서 뷰 맛집이었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톨레도는 한 폭의 그림과 같았고 시간이 늦어질수록 변하는 하늘색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주변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달까. 이런 행복한 순간에도 우리에겐 걱정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저녁 식사. 근처에 식당을 찾을 수 없다. 아이들도 어리기에 차를 타고 또 이동해서 주차를 하고 무엇인가 먹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블로그 후기를 검색해보니 이 호텔 식사가 그렇게 맛이 없단다. 호텔 식당인데 맛이 없다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세상에 모든 것을 가지긴 어려운 법 아닌가. 이곳은 뷰가 너무 훌륭하니까 레스토랑까지 대단하긴 어려울 수도 있다.


다른 선택지가 딱히 없어서 호텔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더운 날씨에 아기들도 지친 듯했고, 소도시의 작은 식당에서 아기 의자 둘을 찾을 자신도 없었다. 게다가 유모차까지 둘이다. 커다란 식당을 갈 수밖에 없는데 시간은 늦어지고 우리 사정을 고려한 추천 맛집 찾기도 어려웠다.


"그래 호텔이라 조금 비쌀 테지만 그냥 한 끼 때우는 거지 뭐. "


악평 가득한 후기 덕분에 기대라는 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식사는 해야하니까 아이들을 위해 크로켓 한판을 시켰다. 다른 건 몰라도 고기는 실패 확률이 낮을 것 같아 커다란 스테이크도 시키고 말이다. 간단하게 식전 빵과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불에 그을린 파프리카 절임과 멕시코 향이 나는 토마토소스. 향만 맡아도 배가 고파지는 마법. 한입을 먹으니 얼른 퍼먹고 다 끝내고 싶은 맛. 아뿔싸 기대감이 꿈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한다.


어제 식당 바에서 할머니 네 분이 크로켓에 와인 드시는 걸 보고 오랜만에 한번 시켜봤는데 감동적으로 맛있었다. 크림이 가득한데 안 느끼하고 고소한 건 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어릴 때 좋아하던 베샤멜소스 올라간 새우 그라탱이 생각났다. 나는 크로켓은 안 좋아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맛있는 크로켓을 못 먹어본 적이 없을 뿐이었다. 앞으로 뭘 안 좋아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크로켓은 맛있는 음식이구나! 계란판 같은 접시에 담아 주는 것도 귀여웠다. 아기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입은 매우 정직해서 맛없는 것은 바로 얼굴을 찡그리며 뱉어내고 싶어 한다. 오물오물하면 눈이 커지고 엄마, 엄마 부르며 더라고 하는 것을 보니 이것은 정말로 맛있는 음식인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집이 왜 맛집이 아닌지 의심이 되는 수준!


크로켓


촌스럽게도 스테이크는 미디엄 웰던 이상으로 먹는데, 스페인에서는 늘 주문한 것보다 덜 익혀주는 느낌이라 바짝 다 익혀 달라고 부탁했다. 주문한 스테이크가 드디어 나왔다. 정확하게 미디엄 웰던! 많이 익혔지만 겉은 진짜 얇게 바삭하고, 한입 먹는 순간 뜨끈한 육즙이 팡! 터지는 그 느낌. 먹는 순간 나도 신랑도 눈이 마주쳤다.


"와, 정말 맛있다."


나야 외식에 늘 흥이 나는 사람이지만, 음식에 감흥 없는 신랑까지 맛있다를 연발하며 먹는 커다란 스테이크. 날것 느낌이 남아있지 않으면서 육향이 강하고 촉촉하다. 게다가 무려 500g의 소고기라 너무 푸짐하다. 물론 굵은소금을 뿌려서 짭짤하고, 플레이팅도 호텔 치고는 투박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사소한 일일 뿐이었다. 모든 것을 넘어서서 감동을 선사하는 육즙 가득 스테이크. 그릴 향이 어찌나 근사한지!


졸음이 쏟아지는 아이들이 있어 디저트까지는 먹어보지 못하고 결국 본식 후에 철수했다. 모든 음식이 맛있어서 이곳의 케이크 한조각도 한번 먹어보고 싶었지만 나의 욕심은 내려놓기로 했다. 이미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은 것 만으로 외식은 성공적이고 너무나 행복했다. 톨레도가 너무 더워서 하루 종일 땀을 흘린탓인지 조금 짠 것도 더 맛있었던 것 같다. 절경을 보면서 먹어서 더 그랬을까. 얼마나 맛있었던지 다음날 그다음 날까지 또 먹고 싶어서 계속 생각이 났다. 스페인 작은 소도시, 아무런 기대 없이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인생 스테이크를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여운이 오래도록 남았다.


인생 스테이크

 


예기치 못한 행복은 큰 만족감을 선사한다. 기대없이 들어간 식당이 맛집이라면, 여행지에서 오랜 시간 그리워하던 친구를 우연히 만난다면, 분명 밤에 깰 줄 알았던 아이가 깨지 않고 쭉 자준다면, 사랑하는 이가 어느 보통의 날에 꽃을 들고 나타난다면. 뭐 그런 일 말이다. 그렇게 기대없이 보내던 날에 하나 둘 생기는 오아시스 같은 일 덕택에 종종 일상의 무료함이 씻기곤 한다.

 

기대치가 낮으면 뭔가 좋은 일이 생겼을때 만족감이 커진다.


"아니, 파라도르 톨레도 레스토랑 누가 맛없데? 안 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 "


식당에서 바라본 톨레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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