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입김이 나오는 겨울이 왔다. 이 겨울 해외살이에서 아쉬운 것은 바로 따뜻한 홈 파티.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지 않아도 종종 친한 친구와 서로의 집을 방문해서 요리해먹기도 하고 배달음식을 시켜 차려먹기도 하는 것. 꼭 무슨 결혼, 이사 등의 커다란 이벤트가 있어서 만나는 것은 아니다. 장을 봤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네. 요즘 킹크랩이 엄청 싸데. 나 새로 그릇 샀는데 보여주고 싶어서. 요즘 회사가 빨리 마쳐. 핑계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딱히 접선의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된다. 마음이 맞고 시간이 허락하면 만나는 것일 뿐. 게다가 자고로 맛있는 음식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함께 먹어야 더 즐거운 법.
물론 올해는 상황이 다르겠다. 그런 일상의 여유가 사치 혹은 위협이 되어버렸으니까. 우리 집도 같은 이유로 혹은 다른 이유로 마찬가지다. 올해의 불청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손님 초대는 일상에서 이미 멀어져 있었다. 아기 둘과 함께 홈파티를 할 만큼의 내공이 없는 초보 엄마라서 랄까. 이상하게 마음의 여유가 없다. 집에 초대해서 식사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던 시절도 분명 있었고 가까운 회사 동료들과 집에 와서 같이 집밥을 해먹은 날도 생생한데 말이다. 이곳에서도 누군가와 허물없고 편한 사이가 되면 집에 불러 팬트리에 있던 파스타를 후다닥 삶아 소스에 비벼 함께 먹을 수 있을까. 친구와 같이 라면 끓여먹는 것처럼 말이다.
딱 이맘때쯤이 었던 것 같다. 사진 저장 공간에서 알려준 과거의 일상. 내 친구의 집밥 초대. 그날은 왜 만났더라. 연어를 사 왔는데 너무 크니까 얼른 오라고 했다. 싱싱해서 냉동하면 아깝다나 뭐라나. 바쁜 남편들을 뒤로하고 칼퇴만 하면 급히 번개 하던 나의 친구. 서로 사는 곳은 달라도 오랜 시간 알아온 친구인 터라 무슨 얘기도 편안하게 할 수 있고 마음의 부담이 없다는 장점도 있다. 둘 다 회사원이니 다음날 부담될 만큼의 시간은 보내지 않고, 혼자 외롭게 저녁을 먹지 않아도 된다. 라이프 스타일도 꽤나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먹는 것이 매우 중요하거니와 맛이 없는 것을 먹고 배가 찼을 때 기분이 좋지 않은 것까지 같다니 비슷한 취향 덕에 가까워지는 사람의 인연이라니 참 신기하다.
"우와! 이거 다 네가 한 거야?"
눈을 뗄 수 없이 오감을 자극하는 한상 가득한 플레이팅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나씩 놓인 플레이스 매트 덕에 뭔가 내가 이 자리에 초대된 특별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다 함께 하는 식탁이지만 매트만큼의 나만의 공간인 것이다. 특별히 마련해준 작은 네모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 날의 집밥 메뉴는 실로 엄청났다. 연어 스테이크와 김치볶음밥. 횟감이 될 만큼 신선하다고 강조를 하더니 듣던 대로 싱싱했다. 생선의 비릿함은 온 데 간데없고 핑크빛 촉촉함과 따뜻함이 가득했던 스테이크. 연어 스테이크를 집에서 이렇게 구워 먹다니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메인만으로도 근사한데 상큼함을 더해줄 샐러드까지 있다. 다채로운 채소에 껍질을 벗겨낸 오렌지와 솔방울처럼 하나씩 놓여있는 검정 올리브 위에 치즈를 갈아 솔솔 올려주었다. 직접 갈아내는 걸 보니 얼마나 맛있을까 기대 또한 커진다. 마지막으로는 발사믹 소스를 좌우로 슬슬 흔들며 뿌려 주는데 이곳 마치 레스토랑. 우리만 있으니 이것은 말로만 듣던 프라이빗 다이닝인가!
모든 것의 디테일이 훌륭했다. 집밥스러운 푸짐함에 외식스러운 특별함까지 더해져서 말이다. 좋아하는 아스파라거스가 사이드여서 자꾸만 손이 갔고 김치볶음밥 위의 달걀노른자가 찰랑이는 상태여서 고슬고슬함과 촉촉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김치볶음밥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아낀다는 접시를 내어준 것에 뭔가 고마움이 가득해졌다. 장인이 파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고, 덴마크에서는 왕실에서도 사랑받는다는 바로 그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특별할 것 없이 자주 보는 보통의 친구인데 이런 정성스러운 식탁 차림이라니. 짙은 색 위주의 그릇과 함께 두어 더 돋보였던 포인트 접시. 사진에서만 봤지 실제로 보니 더 예뻐 스페인에 오자 나도 한번 따라 사본건 비밀 아닌 비밀이다.
바쁜 직장인 부부가 식사 초대를 해준다는 고마움에 우리도 와인과 디저트를 준비했다. 직접 만들진 못했지만 색색깔의 정교한 조각 케이크를 친구도 마음에 들어하는 듯했다. 지나가는 늦가을이 아쉬워 준비한 밤 베이스의 몽블랑과 생과일을 좋아하신 다는 친구 남편 분을 고려해서 딸기가 잔뜩 올라간 타르트, 그리고 언제나 실패가 없는 밀풰유 까지. 달콤한 디저트와 짭짤한 치즈까지 함께 하며 루비 빛이 넘실대는 와인잔을 함께 드니 뭔가 축하할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와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도 참 좋다. 그렇게 그날은 주말의 여유를 즐기며 웃었다. 날씨가 춥다며 티팟에 차까지 우려 주는 친구. 그녀는 지금 따뜻한 연말을 보내고 있을까.
친구와의 그런 시간을 보내본지가 오래라 문득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그리운 힐링과 소소한 행복. 편안한 사람과의 수다는 지금 당장 소환할 수 없어도 차선책으로 무엇이 그 식탁을 그렇게 풍요롭게 했는가 곰곰이 떠올려본다. 요리 솜씨야 나는 따라가질 못하겠지만 소소한 쇼핑으로도 채울 수 있는 식탁의 센스 같은 것 말이다. 부엌에 서서 한 접시에 음식을 담아 급히 때우는 한 끼가 아닌 제대로 차려먹는 집밥. 외식도 못하는 요즘 같은 날쓸쓸한 채 가만히 있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꺼내본 것은 바로 이것.
접시 밑에 깔아 둘 플레이스 매트, 보기만 해도 사길 잘했지 뿌듯한 접시, 그리고 와인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