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직장인 몇 년 차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질 않지만 나는 대리였다. 스트레스는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날 아침은 영 컨디션이 이상했다.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서 속을 비워냈다. 임신 일리도 없었다. 머리도 아프고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렇게 급히 병가를 내는 것이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했다. 오늘은 회사에 가지 않기로 했다. 신랑은 출근하고 나는 택시를 불러 동네 내과에 가보기로 했다. 아파트 입구에 서서 기다리는 것도 어려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냥 힘이 없다고만 생각했고 가장 가까운 병원에 갔다.
이수역에 위치한 자그마한 내과.
"선생님 힘이 없어요. 소화도 안 되는 것 같고요. 머리도 아파요. "
직장인이면 누구나 겪는 신경성 소화 불량으로만 생각했지 그 이상은 상상도 해보질 않았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시던 의사 선생님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고 하시며, 즉시 피검사부터 해보자고 하셨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나를 다시 부르신 선생님은 조금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출혈이 있는 것 같아요. 얼른 대학 병원으로 가서 정확한 원인을 찾아야 해요. "
피곤해서 걱정이 되다가도 괜찮겠지 생각했다. 다행히 선생님은 가까운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후배 의사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주셨다. 도착하자마자 그분을 만나 뵙고 위 내시경이란 걸 처음으로 받아봤다. 보고 바로 위에 출혈이면 지혈해야 한다고 해서 수면으로 진행하지 못했다.
첫 내시경의 추억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출혈성 위궤양이 있어 위출혈이 심했다고 한다. 뭔가 고문당하는 듯한 기분과 함께 치료를 마쳤다. 그리고 곧바로 꼼짝없이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며칠 동안 물도 마시지 못하고 수액과 링거에 내 몸을 맡긴 채 병상에 누워 있으니 마음이 허해졌다. 제발 다시 먹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 했다. 4일 뒤 처음 마신 음료는 포카리스웨트였다. 나는 그게 그렇게 맛있는 음료인지 처음 알았다.
나에게서 가장 연약한 부위가 위라는 것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대학병원에서 본 내 위의 모습은 피범벅이었다. 염증으로 가득 차서 위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생각해보면 신호가 있기도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위가 딱딱했다던지, 매운 것, 알코올 거의 모든 것에 약했던 내 입맛. 점점 소화가 안 되는 것 같기도 했고,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면 이전만큼 먹질 못한다는 얘기도 들었으니.
그래도 입원해서 확 굶은 그 며칠의 충격 여파로 나는 깨끗하고 핑크 핑크 한 위 만들기에 돌입하기로 했다. 그냥 위염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지금부터 꼭 관리를 잘해야 앞으로 크게 아프지 않을 거라는 당부도 받았으니까 말이다. 식탐 부리다 이렇게 되었나? 난 특별한 대식가도 아니고, 괴식도 술도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조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건양배추즙 마시기. 양배추 쌈을 먹어봤으니 양배추는 달콤하고 맛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정말 착각이었다.
ㅂ ㅜ ㅔ ㄹ ㄱ
뷁, 우웩
처음 접한 양배추 즙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오수를 마셔본 적은 없지만 이건 분명 ㄸ물이었다. 색깔 또한 투명한 갈색 액체. 왜 이런 걸 먹으면 위가 좋아질까 반신반의했지만 어떨 수 없다. 한 박스를 샀으니 끝은 봐야 한다. 코를 막고 마셔도 어려운 양배추즙. 어느 글에 보니 아주 차게 해서 마시면 그나마 낫다는 말에 즉각 파우치를 냉장고 속에 넣었다.
양배추즙의 효과는 실로 놀라웠다. 아침마다 공복에 마시면 쓰라렸던 속이 달래 졌다. 건조한 얼굴에 스킨을 바르면 피부에 쫙 스며드는 느낌이 나듯 위가 촉촉해진달까 나. 아픔이 사라지고 편안해지는 것만으로도 이것을 매일 마실 이유는 충분했다.
위장병 환자에게 과식, 야식, 밀가루식, 커피는 위에 직격탄을 날리는 행위와도 같다. 그렇지만 나도 일에 찌들어 사는 직장인인데 어떻게 속세를 벗어나서 사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차단할 수 있겠나. 조금 알싸하게 아픔이 시작되면 얼른 양배추즙을 찾아 먹었다. 우는 아이의 공갈 꼭지처럼 내 위는 뚝 그쳤다. 매일 한두 번씩 마시다 보니 역하다는 느낌도 사라졌다. 실온 제품을 마셔도 아무렇지 않았다.
우선 안 아파서 좋은 게 가장 좋았지만 소화기관의 모든 활동이 원활했던 것도 큰 장점이었다. 내가 입원 한 줄도 모르고 출근 후 한동안 보지 못했던 선배들이 얼굴색이 좋아졌다며 다이어트 휴가 다녀왔냐는 얘기도 들었으니. 양배추즙을 찾을 수밖에.
몇 달 뒤 추적 검사를 위해 다시 찾은 대학 병원. 그때처럼 쌩 내시경은 하지 않고 수면으로 우아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선생님께 결과를 듣는 시간. 얼마나 칭찬을 들었는지 모른다. 관리를 너무 잘했다는 말도, 피투성이 모습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아이보리색에 가까운 연한 핑크 빛이 된 나의 위도 자랑스러웠다. 양배추즙 덕문인걸.
스페인에서 양배추즙을 따로 팔지는 않지만 지금도 종종 속이 아플 땐 양배추를 끓여 갈아먹는다. 어김없이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우리 집 쌍둥이에게도 민간요법으로 전해 주고자 한다. 진짜 좋은 데 어떻게 알릴 방법이 없네. 이 곳에라도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