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롱 May 07. 2021

와인 한 잔의 치유

Bar Manero @ Madrid, Spain

여행이 그립다. 익숙한 공기와 반복되는 하루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새로운 환경을 마주하며 잠시 휴식하는 시간.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묘미는 바로 ‘식문화 경험’이 아닐까. 떠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려고 SNS 사진을 들여다본다. 스페인의 대표 신문 엘빠이스(El Pais)의 음식 평론가 호세 카펠(Jose Capel)의 인스타그램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분명 그도 나도 스페인에 사는 데 왜 이렇게 달라 보이는지. 여러 가지 화려한 음식들 가운데 한 사진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바로 랍스터 롤. 말랑말랑 갈색빛 감도는 부드러운 브리오슈에 오동통한 랍스터 구이가 듬뿍 올려져 있고 크리미 한 소스가 곁들여져 있는. 이럴 수가 공교롭게도 식당의 위치가 마드리드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먹으러 가야겠다.
  
바 마네로(Bar Manero). 스페인 남부에 위치한 해변 도시, 알리칸테에 본점을 둔 스페인식 타파스 바. 최근 까를로스 보쉬(Carlos Bosch)라고 하는 가게 주인이 마드리드의 청담동이라 불리는 살라망카에 새로 지점을 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을 닫는 음식점이 많은 요즘. 새로운 음식점이라니 반가운 소식이다. 알리칸테 본점의 성공 덕택인지 오픈 전부터 언론의 관심을 받았고 가오픈 기간에도 사람이 만석이었다는 소식. 가보기도 전에 기대감이 가득해져서 사전 조사까지 해본다. 홈페이지 한편에는 이런 글도 있다. 알쏭달쏭하지만 기억에 남는 한 줄.

"와인은 우리 걱정을 씻어주죠. 영혼을 달래주고요. 슬픔이 꼭 치유되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
(El vino lava nuestras inquietudes, enjuaga el alma hasta el fondo y asegura la curación de la tristeza)
 
비가 내리는 금요일 오후에 방문한 바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영화 <위대한 개츠비>였다. 영화 속 화려한 파티 장소를 연상케 하는 인테리어에 마치 시공간을 초월하여 여행 온듯한 기분이 들었다. 궂은 날씨와 상관없이 사람들도 가득 차서 활기 넘치는 이곳. 입구가 아담해서 매우 작아 보이는 곳이지만, 대신 건물 깊숙이 기다란 형태를 하고 있다. 아주 큰 공간은 아니지만 알차게 네 가지 테마로 구분되어 있다. 처음 들어가면 석화와 샴페인 한잔이 어울리는 해산물 섹션이 있고, 다음은 하몽 초리조 치즈류를 진열해둔 샤퀴 테리 섹션, 첫 두 공간은 하이체어를 배치해 두었다. 더 안쪽은 낮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 쪽에는 온갖 리큐어를 진열해둔 칵테일 제조 바와 테이블만 있는 프라이빗한 공간이 있다.

미리 예약을 안 한 관계로 자리 선택지는 없이 안내해주는 곳으로 앉았다. 세 번째 공간인 칵테일바가 있는 곳. 낮은 테이블에 앉을 수 있어 더 편안했다. 붉고 어두운 인테리어와 녹색의 벨벳 의자 그리고 바를 비추는 동글동글한 조명까지. 화려한 아르데코 풍 공간에 눈을 떼지 못한다. 이곳 마네로(Manero) 이름을 딴 자체 로제 와인 한잔과 칵테일 한잔을 시키고, 곧바로 꿈에 그리던 랍스터 롤을 주문했다. 드디어 맛보게 되는 것인가!

사진상으로는 랍스터만 있는 줄 알았는데, 브리오슈 안은 게살을 발라 만든 스프레드로 채웠다. 그 위에 랍스터 살까지. 호사스러운 한입, 벌써 첫 입에 행복하다. 빵은 따뜻했고 필링은 차가웠으며 탱글탱글 랍스터는 당연히 화룡점정. 하나하나 온도와 식감이 완벽했다. 빵이 이렇게 맛있는 것을 보니 어떤 샌드위치를 먹어도 만족스러울 것 같다. 먹기 편안하게 얇은 비키니 샌드위치도 팔고, 스페인의 인심을 닮은 두툼한 샌드위치 보카디요 (bocadillo)도 여러 메뉴가 있다. 정신없이 먹는 것에 열중하다 동행과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웃었다.

"이렇게 만나는 거 얼마만이야."
"여기서도 쉽게 기분 낼 수 있는 걸. 그동안 너무 여유 없이 살았네. "

각자 일로, 육아로 정신없이 보내는 일상에서 완벽히 차단되어 보내는 이 시간. 걱정도 쫓기는 듯한 기분도 스트레스도 없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조금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근사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축하할 일이 있는지 아주 신나게 대화를 한다. 한껏 상기된 기분. 이 공간의 모든 사람이 그랬다. 연이어 나오는 접시에 감탄하고 넘실대는 와인잔을 들고 마주 앉아 못다 한 얘기를 나누는 모습. 금요일의 행복을 일찍부터 가득 만끽하기.

랍스터 롤의 감동을 이대로 끝내기 아쉬워 디저트까지 먹기로 했다. 오늘의 선택은 또리하(Torrija) 스페인식 프렌치토스트, 국민 후식이다. 보통 길에 있는 동네 제과점에서도 살 수 있는 메뉴지만, 화려한 접시에 예쁘게 담은 또리하는 디테일이 달랐다. 설탕 표면을 토치로 그을려 바삭해진 겉과 캐러멜 향이 솔솔 나는 폭신한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접시는 나눠먹기 싫을 만큼 황홀한 메뉴였다. 디저트까지도 훌륭했던 이곳. 다른 메뉴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된다.

마치 여행을 온 것 같았다. 이게 얼마 만에 와보는 바인가 감탄하며 구경하기. 현실을 잠시 잊고 친구와 수다 떨기. 문 하나를 열고 들어왔을 뿐인데, 새로 생긴 이 작은 공간에 이런 화려함이 숨겨져 있다니 이곳을 만든 사람은 천재임이 분명하다. 도심 속 바쁜 일상에서 반가운 휴식이었다. 와인이 우리 걱정을 씻어줄 거라는 이야기. 처음에는 과장된 말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잠시의 여유. 아무 근심 없이 현재를 오롯이 누릴 수 있는 장소. 일렁이는 와인 한잔에 무한한 위로를 받으며 여행의 자유를 잠시 만끽할 수 있었다. Bar Manero.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