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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summer Oct 13. 2020

나는 괜찮은 남편이 있어도 짜증이 난다

분명 열 받아서 먹기 시작한 달콤한 케이크였는데 먹다가도 네 생각이 나

남편이 주방에서 어제 과카몰레를 만들고 남은 양파를 볶고 있다. 아침 7시부터 양파만.

"뭐 하는 거야?"

"양파 그냥 두기 좀 그래서. 자기 뭐랑 볶아 줄까 생각하고 있어 계란이나 김치? 양파는 볶으면 양파만 먹어도 맛있잖아요"

순간 짜증이 났다.

내가 오늘부터 다이어트 보식한다고(비록 어제 맥주 한 캔을 땄지만 말이다) 오전에는 과일만 먹겠다고 한 것을 까먹은 건가? 게다가 정작 본인은 아침을 먹지도 않으면서! 심지어 나는 지난 일주일간 하루는 과일만 먹고 하루는 야채만 먹는 식의 GM다이어트를 하느라 야채만 먹는 데는 물릴 데로 물린 상태였다.

"그럼 자기가 먹든지"


그렇게 나는 또 우리의 월요일 아침 시작에 기름을 붓고 말았다.


더 최악인 것은, 이렇게 적고 나니 나는 정말 내가 별로인 여자 같다는 것이다.

내 남편은 정말 괜찮은 사람인데, 나는 출산한 지 일 년이 다되어가는데 왜 아직도 그 분풀이(?)를, 불안정한 기분을 남편에게 풀고 있는 것일까.



어느 다른 날의 저녁. 2000엔 할인 쿠폰을 가지고 남편과 호화스러운 배달 초밥을 시켜먹으며 나는 우리가 자주 가던 캐주얼한 초밥집을 떠올렸다.

"언제 또 거기 갈 수 있을까"

"에바가 자고 나면 베이비 캠을 틀어놓고 갔다 오면 되지"

"엥? 동네 잠깐 도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애를 혼자 놔두고 나가"

"애가 울면 둘 중에 하나가 급하게 15분~20분 내로 돌아오면 되지"

"자기,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아? 울면 어떡해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남겨진 기분이 어떻겠어. 울어도 울어도 나타나지 않는 부모를 기다리며 얼마나 큰 트라우마에 사로 잡히겠냐고."

"흠.. 난 아닌 것 같은데"

"길 가던 사람들 붙잡고 물어봐. 자기 아버지한테 물어봐. 육아 서적 다 뒤적여봐"

...

"견해가 다른 걸 가지고 내가 맞다 너 혼자 틀렸다 너는 모른다 식으로 얘기하지 마"


대화는 거기서 끝나 버렸고 우리는 각자 묵묵히 할 일을 하며 에바를 씻기고, 어색한 채로 침대에 누웠다. 결혼 전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잠자리 들기 전에는 해결하고 자자고 약속했었는데, 결혼 후 지켜진 적이 잘 없다. 나는 절대로 꺾이지 않으리라 뻣뻣한 막대기처럼 자존심만 강한 사람이라 내 사람을 대할 때일수록 나 자신을 낮추며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것이 능숙지 못하다.



내 남편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어설픈 한국어로 자기소개를 하며 자기는 '곱슬머리에 B형인 남자인데, 한국에서는 그게 꼴통이죠?!'라고 너스레를 떨던 사람이다. 물론 원래 고집은 똥고집일 테고 나보다 훨씬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일 텐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있을 때 자기 마음대로 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원래 '그러한' 사람이지만 나와 있을 때는, 아마 다른 사람과도 '그러한' 면을 드러내고 이기려 들지 않는 사람이다.


최수종급은 아니지만 감사하다 사랑한다 말도 잘하고, 에바가 태어난 뒤로 코로나가 하늘길을 막는 바람에 반년이나 이산가족 이어야 했지만 우리가 돌아온 뒤론 새벽에 에바가 뒤척일 때 다독여주는 것, 창문을 열고 청소기를 돌리고 분유를 타고 기저귀를 가는 것과 같은 아침을 여는 일들은 모두 남편 몫이 되었다. 빨래도 남편이, 더럽고 힘든 똥기저귀 처리나 쓰레기 버리기 하수구 청소와 같은 이른바 가정 내 3D 가삿일들 또한 온전히 그의 몫이다.


무엇보다, 나같이 어려운 여자의 곁을 가져간 남자이다.

내가 대단한 여자라는 게 아니다. 나는 정말 어려운 사람이다. 어릴 때 보는 사주마다 나는 연애결혼은 하지 말라고 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누군가 다가와 마음의 창문을 두드려도 당신은 빼꼼히 내다보다가 결국 금세 빗장을 걸어 닫을 거라고.

그런 나의 마음을 열고, 들어와 사계절을 함께 하고 네다섯 개의 도시를 함께 여행한 남자이다.


아아.

남편을 칭송하는 글을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쓰다보니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 왜 나는 그 사람을 힘들게 하는가! 내 자신이 정말 별로인 사람처럼 느껴진다.


남편과 떨어져 혼자 친정에서 아이를 키우며 보내는 6개월 동안 소중한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일본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잘해줘야지, 잘해주지 않더라도 잘 못해주지 않아야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기념일 챙기기, 비싼 레스토랑 예약하기, 선물해 주기 등)을 해주지 않았다고 잔소리하지도 말아야지 다짐에 다짐을 했건만 이산가족 상봉 후 두어 달이 지났을 뿐인데 우리는 수없이 부딪히고 말다툼을 했다. 저런 시답잖은 대화들 속의 툭툭 튀어나오는 본의 아닌 언어들 때문에. 기록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절대로 기억도 하지 못할 일 때문에 싸우는 게 99%고 심지어 그 바로 다음 날조차 우리가 어제 왜 싸운 거야?라고 서로에게 묻는다.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도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며 아침 일찍 유모차를 끌고 나간 산책길에서는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던 우리. "카페라도 들릴까" 라며 늘 가던 곳을 가봤지만 자리는 없어 그냥 푹푹 찌는 듯한 기분을 그대로 서로가 반사판인 마냥 주거니 받고 있는데 "자기 혼자라도 카페 가서 시간 보내다 와" 남편의 제안.


몇 발짝 걷는 동안 수백 번 고민하다, 아무래도 당을 좀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아 들어와서 시킨 모카케이크와 아아.


나는 초콜릿으로 만든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시켜본 초콜릿 케이크.


…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했던가. 이렇게 짜증이 많았던가. 이렇게 예민했던가.
애 낳고 기르는 게 뭐가 유세라고 이리도 괜찮은 남편을 할퀴는 거지?
나 참 못났다. (오물오물)



아이를 낳고 나서 새 세상이 열린다고 하지만, 새 세상까지는 모르겠고 나는 내가 새롭다. 아니, 그동안 대충은 알고 있었던 나란 사람이 극대화돼서 다가오는 느낌이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데 내가 다룰 줄 모르는 나. 원래 그득한 짜증 포텐셜을 안고 살던 사람인데 가족을 꾸리면서 마음 놓고 바겐세일 하듯 널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짜증을 사주는 상대가 생기면서 더 증폭되고 하루 12시간을 미니멈으로 일하던 나름 커리어우먼이 집에서 아이만 보다 보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아웃풋, 데드라인이 없는 하루하루에 지쳐가고 점차 내 이름을 불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조바심으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운 마음에 더 악을 썼던 것 같다. 그러고는 반성하며 자책하기.


그런데, 그건 그거다.

나의 문제를 '관계'로 가져오면 안 된다. 회사에서 하던 일을 집으로 들고 오면 안 되는 것처럼.


내가 하는 방식이 익숙하다고 해서 내가 맞고 네가 틀린 게 아닌데 내가 '하던 데로'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바로잡으려 하고, 일주일 동안 생야채와 과일을 먹고 물릴 데로 물린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섭섭해하는 마음 또한 '넌 알아야 한다'는 오만이 바탕에 깔려 있다. '다름'이 발생할 때 '다르다'라고 정중하게 전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래야 된다 라고 훈수를 두는 것, 남녀 사이에 종종 발생하는 갑질인데, 사회에서의 갑질은 당하는 을이 피해를 보지만 이 경우에는 주로 괜찮은 쪽에게 괜찮지 못한 쪽이 갑질을 하기 십상이므로 결국 나중에 갑질을 한 본인이 쓰라린 후회 속에서 마음 아픈 경험을 하며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내 남편이 나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You and me vs the world

우리는 한 팀이라고.


(남)을 이기려고 들지 말자.

현관에서 배웅하는 그의 등을 보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를 배웅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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