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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summer Oct 30. 2020

나는 괜찮은 남편이 있어도 짜증이 난다-2탄-

그놈의 집밥이 뭐라고.


오늘 병원 예약이 오전에 가능하면 내가 에바 데리고 먼저 집에 올 테니까 자기는 카페 갔다 올래요?


아침 7:20, 10분 뒤 예약 창이 열리는 병원 홈페이지를 들락날락 거리며 오늘 이유식 메뉴를 짜는 나에게 남편의 순도 100% 선의의 제안. 오늘은 에바 2차 인플루엔자 접종과 나도 같이 주사를 맞고 오는 날이었는데 남편이 같이 병원에 갔다가 에바를 데리고 먼저 집에 올 테니 혼자 커피 한잔 하고 오란다.

"Awwww 너무 고마워!" (눈에서 하트 뿅뿅)


인기 있는 병원이라 예약 창이 열리자마자 예약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대학생 때부터 갈고닦은 광클릭의 민족(?)이어서였을까, 일 순위로 예약이 잡혔다.

"9시에는 집을 나서야 해"


모든 날들이 그렇지만, 매주 수요일은 남편의 은덕을 입는 날이다.

본인의 재택근무 날이면서 나에게 평일의 조용한 자유를 주기 위해 오전 시간에는 미팅을 넣지 않는 그.

에바를 돌봐주며 일하고 청소와 빨래는 어느 순간 해치워놓는 남편 덕분에 나는 그나마 이유식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먹이고 있다. (그게 뭐라고.)

그런 그가 아침에 나갔다 오란다.

그런데 그의 넓은 아량이 내 그릇에는 너무 급작스러웠을까.

9시까지 한 시간 정도 남은 시점에서 남편이 딸의 기저귀를 갈고 먹이는 동안 나는 부산스럽게 빨랫감을 정리하고 이유식을 만들기 위한 쌀을 불리고, 혼자 엄청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아이를 낳고 선크림도 잘 바르지 않은 탓에 기미 주근깨가 폭발한 얼굴에, 얼마 전 반말을 찍찍 내뱉던 의사에게 밀리지(?) 않아야지 하는 이상한 오기에 메이크업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마음이 바빴나 보다.


8:30

"자기야, 나도 이제 씻고 준비할게요"

평소라면, 에바가 일어나기 전부터 씻었던 남편이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나 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나는 당황했지만 이미 대꾸할 여유도 없었다. 서두르는 것을 정말 매우 진짜 싫어하는 나인데 점점 짜증 호르몬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악! 가기 전에 이유식 밥통에 앉혀놓고 가야 하는데! 재료 재료! 악! 에바 아직 양말도 안 신고 잠바도 안 입었네. 나가기 전에 기저귀도 한번 더 갈아야지"


결국 아침부터 짜둔 메뉴대로 만들지도 못하고 냉동실에 가득 만들어 두었던 얼린 큐브들을 대충 집어던지고 부랴부랴 준비하는데 샤워를 끝낸 남편이 나왔다.


8:50

"우리 늦었어!!!! @#$%#%&^*&("

"자기야, 자기랑 에바 먼저 가 있어. 뒤 따라갈 테니까"

"아 됐어! 나 카페 안 갈 거야! 이렇게 급한 마음으로 무슨 카페를 가! 내 짐은 하나도 챙기지도 못했어!"

"왜 그래 자기야 내가 챙겨서 가면 되잖아. 뭐가 필요한지 문자해, 알았지?"


나는 서둘러 에바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오면서 끝까지 다정한 남편에게 더 짜증이 솟구쳤다. 그래 이미 나는 헐크로 변신 한 후였다.


아니, 병원 가는 남자가 무슨 꽃단장이 필요하다고!

왜 갑자기 카페를 가라고 해서!

아침부터 하는 데도 잘 없는데!

이유식은 또 망쳐 버렸네, 그게 아니라 이렇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아 몇 분 남았지? 예약 번호 밀리면 하루 종일 기다려야 된다고 했는데.

하... 이렇게 또 아침부터 짜증을 냈어야 하는 나 자신이 밉다. 에바한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텐데...


병원을 향하면서도 짜증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고 그런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반성의 도돌이표를 찍고 있을 때 즈음 도착한 병원. 병원 엘리베이터를 타며 거울을 통해 드디어 딸아이의 표정을 확인 하나 했는데, 너무 큰 꽃무늬 후드잠바 모자가 흘러내려와 얼굴이 다 가려진 채로 가만히 앉아있었던 딸.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든지, 나는 빵 터져버렸다.

"와하하! 너 이 상태로 줄 곧 가만히 있었던 거야?"


결국 주사를 맞고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혀 울지도 않던 에바.

아이는 기적이라고 하던가, 그렇게 모녀가 함께 부둥켜안은 채로 주사를 맞고 남편에게는 집에 가고 있다고 문자를 보내며 집으로 향했다.



"자기야! 뒤돌아봐봐!"


어느새 병원 건물까지 와 있었던 남편.

"빨리 끝났네?"

"어..."

"자기가 최근에 읽는 것 같은 책이랑, 크로키 북이랑 펜이랑 여기 이어폰. 그리고 노트북도 챙겨 왔어. 이거면 될까?"


카페 안 가겠다고 했지만 막상 아쉬웠던 나에게, 정확하게 내가 원했던 3종 세트를 들고 나타난 남편.

아. 졌다. 이런 남편에게 짜증을 낸 나는 호르몬 악마인가. 헐크는 지구라도 구하지.


내 인생 최고의 채소 베이컨 머핀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전쟁이었는데. 머핀이 이렇게 맛있을 일이야? 남편 사다주고 싶다(오물오물)



그렇게 하루를 잘 보내나 싶더니 점심에는 에바의 이유식 전쟁으로, 그리고 저녁에는 반찬을 준비하는 동안 징징 대는 에바로, 내 정신은 또 혼미해져가고 있었다.


'아, 짜증 스위치 켜질 것 같다 조심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이미 짜증 호르몬에 노란 불이 켜진 뒤였다.

남편은 재택'근무'중이었고 직장 상사와 톡을 주고받으며 실실 대고 있었는데 그게 참 꼴 보기 싫었다.


아침에 맞고 온 플루 샷 때문이었을까. 유난히 징징대는 에바와 노트북만 들여다보고 있는 남편.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아는데 그냥 내가 하던걸 내려놓고 에바의 기분을 맞춰주면 되는 거였는데 이 '시추에이션'에 오늘 저녁도 짜증이 폭발했다.

애밥이든 어른밥이든 그놈의 집밥이 뭐라고 나는 그리도 집착하는 걸까.(별거 아니게 보여도 원래 고기 없는 반찬이 더 손이 많이 간다)


"자기야, 쉽게 살자. 나 알잖아. 단순하게 살아요. 요리하지 않아도 돼. 그냥 시켜먹거나 사 먹자! 힘들면 다른 살림도 하지 말고 에바랑 놀아줘도 되니까."


남편의 또 다른 순도 100%의 나를 생각해준 한마디. 나는 고분고분 해 질 수가 없었다.


왜?! 나 요리 좋아한단 말이야! 나도 다른 일 하고 싶어! 왜 에바가 먹고 흘린것만 하루종일 닦고 있어야 해?! 나도 내가 먹을 거 맛있게 하고 싶어!

이런 호르몬 마녀가 있을까. 남편이 그 어떤 좋은 말을 해도 가시로 되받아치는 능력이 내게 있나 보다.

짜증을 부렸다는 죄책감에 풀이 죽어 있는 나를 어떻게든 토닥여보려는 남편. 이정도면 나는 줄곧 악녀역할일테니 괜찮은 남편 시리즈로 브런치 매거진을 쓰는게 더 맞지 않을까? 시댁에서 보시면 쓰러지실까. 결국 오늘의 나는 독감주사에 취했던 걸로 결론지으며, 그 어느 날 공원에서 잠시 부러워 하며 지켜 보았던 행복한 다자녀 가족의 그림은 그냥 추상화였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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