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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summer Nov 07. 2021

괜찮은 남편이 동굴에 들어갔다.

남편이 식음을 전폐한 지 이틀째다.

정확히 말하면 나와 마주하고 밥을 먹지 않는다. 휴대폰도 들여다보지 않아 시댁의 연락창구를 내가 도맡아하고 있다.


토요일 아침, 느지감치 눈을 뜬 나에게 남편은 대뜸,

"나 우울해 혼자 있고 싶으니까 자기는 하루 종일 자기가 좋아하는 거 먹고 좋아하는 거 하면서 시간 보내. 에바는 내가 볼 테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늦게 일어나서 그래?"

"아니야 자기랑 싸우자는 거 아니야 자기가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내가 우울해서 그래. I hate my life"

"... 왜 그러는데"

"Just leave me alone, 그냥 행복하지 않아서 그래. 자기도 그래 보이고"


그날 아침에는 몰랐다.

내 남자의 우주를 봐주기보다 내 우주에 폭탄을 던지고 간 그에게 원망만이 앞섰다.

일도 잘 안풀리고, 그렇다고 좋은 아빠/남편인것 같지도 않고 급격하게 살찐 자신의 모습에 자신감을 잃어 자기 인생이 싫단 말을 몇번 한적이 했었는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정말 토요일 내내 남편은 철저하게 혼자서 에바를 돌보았고, 에바는 그저 혼자만의 시간에 전혀 방해 되지 않는 귀여운 반려동물 즈음의 존재인건지 나와의 물리적 공간과 시간을 구분 함으로써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나 또한 남편의 갑작스러운 선언과 뜻밖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였지만 마침 몸도 좋지 않았기에 하루 종일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누워만 있었다. 나와 밥도 함께 먹지 않겠다는 남편의 말에 상처 받고 더 누워만 있었다. (정말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침대에서 자다가 말다가 자다가 말다가. 밤에는 너무 많이 자서 두통이 심해서 수면을 유도하는 타이레놀 피엠을 먹고, 그렇게 낮잠을 자놓고도 딸아이를 재우다가 나 먼저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것일까.

평소에 잔소리가 심했나.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감정 표현을 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여기저기 다치고 아파 거의 기능하지 못했던 아내를 대신해 발로 뛰던 남편이 지친 것일까.

우울할 때마다 끄적인 내 일기장을 봐버린 것일까,

그와 다툴 때마다 휘갈겨 내려간 그에 대한 불만의 글들을 읽은 것일까.

연애시절엔 자주 있었던 그 시기- 오랜만에 찾아온 그의, 남자들만의 'cave'에 들어가 버린 것일까,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들어가 있을까.

나와는 다른 고민, 내가 평생 모를 고민- 가장의 짐이 무거워진 것일까..


연애할 때야 각자 집에서 나오지만 않으면야 눈에 띄지 않는 것쯤 쉬웠지만 한 지붕 아래 함께 조각한 보석 같은 딸아이를 사이에 두고 있을 때는 어떻게 무시 아닌 무시를 해야 할지 몰라 나는 초조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이유를 모르니 더 답답했다.



수면이 약이었을까. 일요일 아침에 나의 컨디션은 꽤나 가뿐했다. 너무나 갑작스레 동면을 선언한 그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 우리 사이에 대한 불안함보다는 온전한 그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내가 먼저 에바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나섰다. 정말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어주고도 싶었지만 발목 골절로 한 달도 넘게 딸아이와 제대로 된 산책 한번 하지 못했는데, 한껏 아름다운 가을 날씨를 느껴보고도 싶었다.


"에바야 아빠가 아프고 슬프니까 엄마가 더 아프고 슬프다. 엄마가 아빠를 많이 사랑하나 봐."


아스팔트 바닥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다가 너무 당연해서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두 돌도 안 된 아이에게 읊조렸더니 딸아이는 엄마, 아빠 라며 그림인지 글인지 점인지 선인지도 모를 것들을 끄적이고는 웃고 있다.


따로 밥을 먹더라도 남편이 좋아하는 고기반찬을 해주면 조금이나마 힘이 날까 싶어 장을 보고, 정말 정말 맛있게 수육을 삶아냈다. 갖가지 반찬들도 정성스레 담아내어 말 그대로 구첩반상을 차려내고 남편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먼저 먹으라는 말 뿐이었다.

이럴 땐 모른 척 해주는게 정말 도움이 될 것 같아 포기할까도 했지만 따뜻할 때 먹으라고, 내가 나중에 먹겠다고 차려놓고 물러났다.


그러다 어찌어찌 겨우 식탁에서 마주한 남편에게 간절한 진심을 토로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러는 거라면 솔직히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용서해줘.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진심이었다.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빌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덜 아프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의 사소했던 그 무엇, 무심함 하나라도 용서를 구해보고자 했다. 말하고나서도 내 진심에 스스로 울컥 했던 것 같다. 최근에 꼭지점을 그리며 딸아이에게만 온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우리가, 이렇게 진심어린 한마디를 나눠본 적이 있었던가.

내 감정에 가뜩이나 힘든 남편이 더 부담스러울까 애써 눈물을 삼키고 보니 남편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용서할 거 없어 자기가 잘못한 거 아니야"


20대이후로 장례식서조차 울어본 적 없다는 우리 남편.

덤덤한 듯 한마디 툭 던지고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마신다.




내 사랑이 아프다.


가장 가깝고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의 아픔이 손끝에서 닿지 않는다. 나를 등진 그 사람의 등이 애잔하다. 그동안 말로 표현할 수 있었던 슬픔, 긴장, 미움들을 얼마나 가볍게 지나쳤었는지 그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내 가슴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의 눈물은 무슨 의미였을까.

미안해서였을까, 고마워서였을까. 미움이었을까.


묵묵한 기다림.

그것밖엔 내가 해줄수 있는 게 없다. 이번엔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그가 동굴에서 나올 때 즈음 활짝 벌린 두 팔로 맞이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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