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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summer Oct 19. 2020

코딱지만 한 베란다에서 깨달음

Life is too short

워낙 한 폼생폼사 하는 남편이기도 하고, 미쿡 사람이라 그런가 내 남편은 야외에서 먹고 마시는 걸 엄청 좋아한다. 일본은 워낙 소방법 같은 것이 엄격하여 스카이 테라스가 딸려있는 식당에서조차 케이크에 촛불을 못쓰게 하고 다른 나라에 비해 테라스 석이 딸린 레스토랑 자체가 많지 않은 편이다. 남편 썰에 의하면 가정 내 베란다는 대부분 빨래를 널기 위한 자리로서만 활용된다고 한다.

그런 남편이 우리의 코딱지만 하지만, 뷰만큼은 죽여주는(에바를 임신하기 전, 뷰때문에 이 집을 골랐었다) 우리 집 베란다를 어찌 활용할 수 없을까 하다가 기어코 손바닥만 한 테이블을 설치하고, 접이식 소파까지 구입하여 나에게 엄청나게 프레젠테이션을 해주셨다.


"어때, 편하지? 자기도 맨날 에바랑 방안에서만 있기 답답하잖아. 에바 잘 때는 여기 나와서 이렇게 밖을 내다보면서 멍 때리고 커피도 한잔하면서 글도 쓰고 그래요"

"여기서 자기랑 술 한잔 하면서, 삼겹살 캬~!" (참고로 일본 맨션 베란다에서 바비큐는 절대 NG다)


귀여운 남편. 본인의 로망 실현을 위해 구입한 기자재들이 마음에 걸렸는지 내 마음에 어떻게든 들게 하고자 온갖 미사여구로 어필한다. 남자들이 취미생활을 위해 피규어같은 것들을 살 때마다 부인들과 한바탕 한다던데 사실, 내 눈치 봐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자 싶어 이럴 땐 나도 잔소리는 잠시 넣어두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래요, 편하네요 그런데 에바는 어떡해?"

"유모차나, 하이체어를 옆에 갖다 놓고 거기 앉혀서 보면서 먹어야지 뭐. 내가 케어 다 할 테니까 자기는 여기 앉아서 풍경 감상만 하고 있어!"


내가 수긍하자 광대 승천하며 몸소 시뮬레이션까지 하시는 남편.


(... 10킬로 즈음되는 유모차, 의자를 그때그때 옮기겠다니. 정말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대해선 1 귀찮은 것이 없는 남자로구나.)


그래도 내 남편의 작은 로망이라는데 와이프가 그것도 못 들어줄쏘냐. 어쨌든 나도 싫지는 않았기에 남편이 원할 때마다, 날씨가 좋을 때마다 남편에게 못 이긴 척 가끔 베란다로 나와서 스낵을 즐겼다. 마트에서 사 온 저렴한 벤또도, 건조한 초밥도, 다 식은 카레도 여기서 먹으면 맛있긴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 효녀 에바는 크게 보채지도 않았기에 떡뻥을 쥐어주며 번 시간으로 우리는 잠시나마 부부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베란다 로망

이 날도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 공원 한 바퀴 산책하다가 남편이 굳이 베란다에서 뭘 먹고 싶다 한 날이었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날씨에 그의 최애 이탈리아 맥주 비라 모레티로 목을 축이고 있자니 너무 행복해하던 남편이,


일 년에 적어도 1/3은 이런 날씨면 좋겠다.
한 100일?



나는 무심코 그의 바람이 참 소박하다고 생각했다.

1/3이라니. 1/3?


...?!


갑자기 나에게도 현타라는 것이 왔다.


일 년의 1/3이 100일밖에 안된다고? 너무나 야박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텐데. 인생에서 포근한 날씨에 따뜻함 혹은 시원함을 느끼며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음식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남편은 1년에 딱 1/3만 바라는데 그게 고작 100일뿐이라니.

심지어 그마저도 바쁘거나 내 기분이 안 좋아서 못 보고 지나칠 때가 절반일 것 같은데.


남편의 베란다()  아껴주어야지.



뭐에 얻어맞은 듯 벙쪄있는 나를 보고 남편은 애기띠를 맨체로 카레 한 숟갈 뜨다가 어리둥절.


인생 짧다 짧다 하지만 진짜 짧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흐린 날도 여념 없이 사랑하시고, 맑은 날을 공짜로 얻게 된다면 꼭 놓치지 말고 아낌없이 누리시길.


좋은 날 아끼다가 똥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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