펍에서 보는 축구
축구 팬으로서 영국에 산다는 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선 평일이든 주말이든 프리미어 리그를 볼 때 저녁 8시 반이나 11시 경기면 다행이었고, 새벽 1시 반 경기는 보다가 잠들 때도 있고, 중요한 경기가 새벽 4시에 있으면 일찍 자다가 일어나 보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에선 평일 경기는 저녁 8시에 시작하고 주말엔 오후 12시-5시에 시작하니 졸음과 싸워 가며 축구를 볼 필요가 없어서 좋다. 퇴근하고 맥주 한잔하는 시간, 주말에 친구들과 만나기 좋은 시간에 축구 경기를 하니 일상에 축구가 녹아들기 아주 좋은 환경이다.
영국에 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임시 숙소로 지내던 호스텔에서 대만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를 따라 발레도 배우러 가고 뮤지컬도 같이 보러 가곤 했다. 남자친구와 헤어져 힘들어하던 친구의 마음을 알기에 얘기도 많이 하고 같이 있어 줬다. 어느 평범한 저녁, 곧 런던을 떠날 친구가 나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며 맥주를 사겠다고 했다. 하필 그날이 아스널과 맨유의 경기가 있는 날이라 경기 시간에 맞춰 펍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내 한복판을 지나야 하는 데다 저녁 시간이라 교통 체증도 심했고, 내가 내려야 하는 버스 정류장이 하필 운영을 안 해서 (런던에선 종종 상황에 따라 정류장을 막아 놓는 경우가 있다) 10분 정도 늦었다. 펍에 도착하니 문 바깥부터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펍 내부는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영국의 펍이란 이런 거구나! 하면서 친구를 겨우 찾았는데, 친구가 있는 쪽 펍 한구석엔 이상하게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쪽에 있는 TV에선 아스널 맨유 경기가 아닌 에버튼과 뉴캐슬의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축구를 하나도 모르는 친구는 내가 좋아하는 팀이 무슨 팀인지도 몰랐고, 아스널이 무슨 팀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사람이 적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TV를 봤는데 에버튼과 뉴캐슬이 경기를 하고 있을 때의 허무함이란… 곧 자리를 옮겨 아스널의 경기를 봤고, 2 대 2로 끝나 아쉬웠지만 분위기 탓인지, 플레이가 격렬해서 그런지 경기는 아주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환호하고, 욕하고, 노래 부르며 다 같이 축구를 보는 영국의 펍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규모가 조금 있는 펍에선 동시에 여러 경기를 틀어 주는 걸 알았고, 특히 스포츠 펍에선 축구뿐 아니라 크리켓, 테니스, 미식축구 등을 중계하기도 하는 걸 알았다. 런던의 스포츠 펍에서는 이번 주 중계 일정을 문 앞에 적어 놓는 경우가 많고, 어떤 경기를 중계하는지 미리 전화로 확인 후 가는 방법도 있다.
사촌 동생이 런던에 놀러 왔을 때, 영국의 펍을 즐겨야 한다며 집 근처 펍에 가서 아스널과 리버풀 경기를 본 적이 있다. 그날은 리버풀이 5 대 1로 이긴 경기였는데, 내 옆에 있던 아저씨는 리버풀 팬이었다. 골이 5개 들어가자마자 아저씨가 기분이 좋다며 아스널을 응원하던 우리한테 맥주를 사겠다고 했다. 술이 약한 우리는 괜찮다고 했지만 아저씨가 자기 기분이라며 꼭 사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얻어먹고 각자 파인트 두 잔에 만취해서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그 당시에도 정말 웃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더 어이없고 웃긴 날이다.
18-19시즌 리버풀과 토트넘의 챔피언스리그 결승도 친구들과 함께 펍에서 봤다. 나와 친구들, 펍에 있는 사람 대부분은 리버풀을 응원했고, 우리 옆 테이블에 앉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 둘은 토트넘 팬이었다. 우린 기분 좋게 술도 마시고 떠들면서 봤는데, 아저씨 둘은 맥주를 계속 주문하고 경기 내내 표정이 안 좋았다. 전반엔 컴온, 컴온! 이러고 욕도 하고 열정적으로 보는 듯하더니 후반엔 한숨만 푹푹 쉬고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우리가 리버풀 응원하는 게 눈치 보일 정도로 심각한 아저씨들 표정에 웃기기도 하면서 그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다. 한편으론 정말 축구를 좋아하고 자기가 응원하는 팀을 사랑하는 게 느껴져 멋있기도 했다.
역시 축구는 술 마시면서 친구들이랑 같이 봐야 제맛이다. 런던의 주말엔 점심때부터 친구들과 펍에서 만나 두세 경기를 연속으로 보면서 노는 축구 팬들도 많다. 안주 없이 맥주만 시키는 게 당연한, 상대 팀 서포터들과 어울려 같이 경기를 즐기는, 축구장에 가지 않고도 그에 맞먹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영국의 축구와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런던의 펍이 참 좋다. 한국에 가장 가져가고 싶은 영국의 문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