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아이 下

by 박여름

그렇게 아영과의 만남은 천천히, 차곡차곡, 밀도 있게 지현의 삶을 채워 나갔다. 아영이 보여주는 잔잔한 응원은 저녁의 햇살처럼 끈질기게 불안한 마음을 붙잡아 지현의 말은 속절 없이 점차 긴 그림자로 드리워졌다. 어느 날은 달리는 지하철 앞으로 뛰어들고 싶었던 이야기를, 어느 날은 동생이 응당 가져야 했을 시절인 중학생 아이들을 봤던 이야기를, 또 어느 날엔 불현듯 찾아오는 꿈의 이야기를 토해냈다. 지연의 얼굴을 떠올리는 건 너무나 큰 고통이었지만 아영은 때론 느슨하게, 때론 집요하게 지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직면해야만 했다. 아영과 함께라면 지현에게도 조금의 용기가 생겼다. 동생을 지키지 못한 지난날의 자신을 이제는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현씨도 어렸잖아요. 그때도, 지금도.”

아영은 지현이 어리다고 말했다. 두려웠던 것이 당연하다고, 그러니 그때의 자신을, 지금의 자신을 벌하지 말라고도 말했다. 지현은 틀에 박힌 그 어떤 위로보다 아영의 이 말이 마음을 깊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나도 어렸구나. 누군가를 온전히 지키지 못할 만큼 어렸고 아팠구나. 그제야 지현은 문 안에서 울고 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지현은 자신조차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연약한 어린아이였을 뿐이고, 그때의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죄의 무게를 짊어져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날 밤, 지현은 처음으로 홀가분하게 밥을 먹고 잠에 들었다. 어쩌면 마음속 깊이 바랐을 평범한 하루였다.

다음 날, 지현은 지연의 묘지를 찾았다. 손에는 지연이 좋아했던 크런키 초콜렛과 바나나 우유를 든 채였다. 동생과 행복했던 무더운 여름날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지연의 손을 꼭 잡고 동네를 정처 없이 걷던 지현은 얼마 남지 않은 용돈을 탈탈 털어 초콜렛과 바나나 우유를 사 동생에게 건넸다. 지연은 지쳐있었지만 그 작은 간식에 금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니도 같이 먹어. 지현과 지연은 나란히 슈퍼마켓 앞 평상에 앉아 반을 가른 초콜렛을 오물거리며 시시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친한 친구 하은이가 좋아하는 민철이의 이야기, 유치원 선생님이 가르쳐준 재미난 노래, 엄마와 갔었던 어린이 공원의 추억들. 그때 보여주었던 지연의 환한 미소를 지현은 꽤 오랜 시간 잊고 있었다. 분명 밝고 예뻤던 아이였는데, 왜 자신은 그 아이의 아픈 모습밖에 기억하지 않았는지. 자신뿐 아니라 동생까지 벌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슬프게도.


지현은 그때 그 모습처럼 초콜렛의 반을 갈라 동생의 묘비 앞에 놓았다. 더운 햇살이 내리쬐는 무덤가에 앉아 초콜렛을 오물거리며 소소한 수다를 나누는 시간. 지현은 자신의 일상을 전했다. 대학 교양 수업에서 있었던 웃긴 일들과 유독 맛없던 학식과 같은 이야기들. 늘 무거운 마음만이 가득했던 방문이 오늘은 편안했다. 초콜렛을 다 먹고 난 이후에는 바나나 우유를 무덤가에 한 바퀴 둘렀다. 어디선가 앳된 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언니도 같이 먹어. 지현이 남은 바나나 우유를 마시자 달콤한 향이 입 안에 퍼져나갔다.

앞으로도 지현은 지연을 기억할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맑고 밝았던 모습으로. 헛된 죄의식이 만들어낸 악몽에서 벗어나 살아갈 미래엔 지연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훨씬 많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또 올게 지연아. 먹고 싶은 게 생기면 말해줘."


지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와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아영에게 하고픈 말들이 참 많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들으면 아영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버스 창가에 자리 잡은 지현의 눈 위로 설레는 햇살이 비쳤다. 이대로 기대어 잠들어도 좋을 만한 적당한 따스함에 지현은 자세를 편안히 고쳐잡고 눈을 감았다. 마치 엄마의 무릎을 베고 낮잠에 빠져든 어린 아이와 같은 천진한 미소가 지현의 입가에 두둥실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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