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기
첫 번째 과제로 여행 에세이를 제출하고 합평 시간이 왔다. 글쓰기 수업 수강생은 전체 열 명이다. 글쓴이를 제외한 나머지 수강생들이 글쓴이가 제출한 에세이를 읽고 감상과 의견을 들려준다. 내 글은 그 날의 제일 마지막 순서였다. 다른 분들의 글에 의견을 말할 때는 약간 긴장했는데, 내 글 합평 순서가 되니 오히려 담담해지는 반면 술 깨고 정신 차리면 괜히 겸연쩍어지는 것처럼 부끄러움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손 선생님 총평:
"글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많이 봤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글감으로 쓸 때는 힘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차분히 시작해서 감정의 폭이 커지면서 끝난다. 몰입해서 읽었다. 글쓴이가 '나는 여행보다는 산책을 좋아한다'라는 이야기를 한 것도 있지만, '우리가 사는 삶 자체가 여행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주제를 비틀어서 볼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와, 깜짝 놀랐다.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았지만 글을 쓸 때 했던 생각을 딱 집어내서 말씀해주셨다. 글을 쓰기 전 주제를 잡을 때, 우리의 삶 자체가 여행이고 일상 속에서 산책을 하는 것도 일종의 짧은 여행이라고 생각해서 밤 산책에 대해 쓰기로 결심했지만, 글 어디에도 그 생각을 표현하지는 않았는데 모두 전달되었다. 특히 평소에 가깝게 지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만한 사람이 아니라, 딱 두 번째 만남이고 대화도 몇 마디 나눠보지 않은 사람이 내 글만 읽고 내 의도를 이해했다. 물론 손 선생님이 글을 많이 읽고 쓰신 분이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시는 분이라서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글로 소통을 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눈이 똥그레지는 경험이었다.
김 선생님 평:
"앞부분이 솔직한 내용이었고 나와 비슷한 성향이라 공감이 갔다. 묘사가 구체적이라 상상이 잘 된다. 전체적으로 서두르지 않고 자기 속도로 쭉쭉 가는 느낌이다. 후반부에 로맨틱으로 갔다가 친구로 연결되는 마무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김 선생님이 말씀하신 '남자'가 등장하는 부분:
그 날은 혼자가 아니고 고등학교 동창인 남자애와 같이 엔드리스 로드를 걷고 있었다. 꽤 늦은 밤이었고 안개가 살짝 끼어서 어두운 주변과 뿌연 가로등이 대비가 되는 길을 둘이 별 말도 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까만 아스팔트 바닥에 안개의 습기로 살짝 젖어서 반짝거리는 게 예뻐서 바닥만 내려다보며 한참 걸었는데,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니 친구의 손이 보였다. 크고 단단해 보이는 손이었다. 왜 그랬는지 무슨 용기가 났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갑자기 손을 뻗어서 친구의 손을 살짝 잡았다. 남자 여자 사이가 아닌 오래된 친구라서, 내가 갑자기 손을 잡아 놀라지 않을까 했는데 친구는 손에 힘을 꽉 줘서 맞잡아 주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끼면서 고개를 들어서 친구를 올려다보았는데, 키가 컸던 그 친구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미소 지어주었다. 친구의 머리 뒤로 가로등이 반짝였다.
사실 이 남자는 로맨틱은 아니고 오래 알고 지낸 친한 친구라서, 당일 현장은 '기운 내라 짜식'의 분위기였다. 그런데 평을 듣고 다시 읽어 보니 정황 상 로맨틱으로 흐를 것만 같은 분위기가 맞다. 밤이고 습기에 젖어서 반짝거리는 아스팔트는 촉촉하고 주위는 조용하다. 내 기억 속에서 그 밤, 그 길에서의 상황은 너무 확정적이라 서술을 어떤 식으로 하든 내용이나 분위기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없는데, 글로 읽는 사람들 특히 처음 읽는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 묘사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로맨스가 떠오르 겠구나 하는 것을 평을 듣고 알았다. 이 부분을 어떻게 고쳐 적을지 생각을 하며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데 무척 신이 난다.
번외로, 이제껏 생각지 못했던 또 하나의 포인트가 있다. 그동안 나는 당일 현장의 분위기를 해석하는 데 있어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고 따라서 재론의 여지도 없다는 입장이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는 나 혼자만의 확정이다. 그 친구와 그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로맨스라고 외친다면, 당일 현장에 있었던 그 친구도 혹시..라는 생각이 십 년도 넘게 세월이 흐른 지금 문득 든다. 참고로 나는 매우 눈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