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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비 Mar 04. 2020

하청의 하청의 하청

작년 겨울이 시작될 즈음 해서 회사 일이 거의 없었다. 원래 연말과 연초에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하셨다, 사장님께서). 연말은 한 해의 마무리이기 때문에 다들 매입과 매출을 맞춰보고 매출이 과하게 많은 경우엔 일부 매출을 내년으로 넘기기 위해서 하던 일을 멈추기도 한다. 또 1월이 되면 한해 계획을 하느라 일이 준다. 물론 이건 다 대기업의 스케줄이다. 대기업에서 하청의 하청의 하청을 받는 작은 회사들은 대기업에서 일을 주면 주는 대로,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일을 해야 한다.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 하청의 재하청을 받는 곳이다 보니, 매출을 늘리고, 줄이고를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어떤 때는 매일 야근을 해야 하지만, 어떤 땐 저번에 썼던 것처럼 출근하고도 쉬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게 매년 벌어지는 현상이니 이 업계에서 평생을 일하신 사장님은 직원들 월급 줄 생각에 마음을 졸이시면서도 그러려니 하신다. 그런 이유로 1월에 세금이 많이 나오면 빡쳐하시는 거고(연말정산 편 참고). 


우리 회사의 경우 봄부터 가을까지의 매출로 한해살이를 한다(아마 다른 공장도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레이저 공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소소하게 몇 천 원에서 몇만 원짜리 일은 계절에 상관없이 꾸준히 하고 있지만 굵직한 일들은 대개 봄, 여름에 한다. 이때는 다들 야근도 자주 하고, 가끔 일손이 필요하면 사무실 직원들도 나가서 돕기도 한다(고 그러셨다, 사장님이. 그땐 전 빼주십시오). 


이제 그렇게 일을 위해 시동을 거는 계절이 왔다. 사장님과 공장장님은 1월 말부터 거래처에 연락을 돌리며 올해는 큰 사업이 없냐며 영업을 하셨고, 몇 번의 서류를 주고받으며(물론 그 사이에서 모든 서류 작업은 내가 했고. 이렇게 깔때기 한 번!) 크지 않지만, 한 달 월급 정도의 사업을 따오셨다(중소기업, 아니 경기업의 사장은 영업까지 같이 해야 하는 극한 자리다. 사업하려고 했던 거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한 달은 괜찮겠구나 하며 안도의 숨을 쉴 쯤해서 작은 사건이 있었다.


사장님이 따오신 사업이 어떤 것이었냐면, 이름만 들으면 아는 한국의 대기업 중 한 곳에서 하청한 사업인데, 그걸 몇 단계의 재하청을 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A라는 완성품을 위해서 B, C, D, E... 등의 파트로 나누고 B, C, D, E.. 등등을 하청을 주면, 또 하청 받은 회사가 B-1, B-2, B-3.... 등으로 하청을 하는 것. 그럼 또 B-1을 하청 받은 회사가 B-1-ㄱ, B-1-ㄴ 등등으로 또 하청. 우리 회사는 'B-1-ㄱ' 정도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래처인 (다) 회사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왜 그 일을 하냐고 말이다. 어리둥절 한 사장님은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사건의 전말은 이런 것. 


 (가)라는 회사와 (나)라는 회사가 'B'를 두고 경쟁을 하게 됐는데, B-1-ㄱ을 할 회사를 구하지 못해서 (가) 회사가 이 일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림으로 그리자면..)

허접하게 그려 본, 갑의 하청들.


 그런데 원래 (가) 회사가 하청을 받았더라면 B-1을 (다) 회사가 하청을 받으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게 B-1-ㄱ의 일을 주려고 생각지도 않았던 (가) 회사가 막상 (나) 회사에게 일을 빼앗기고 나니 화가 나서 이래저래 화가 나서 (다) 회사에 전화해서 분풀이를 한 것이다. 그러면서 하청업체 관리 잘하라고 그랬다고. 


전국에 공장이 무지무지 많이 있지만, 정말 다양한 것들을 만들고, 만드는 것도 세분화되어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비슷한 일을 하는 공장들은 적다. 같은 레이저 회사라도 철재를 절단할 수 있는 크기와 모양이 다르다. 또 한 번에 해낼 수 있는 양도 공장의 규모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하청을 주는 곳과 받는 곳은 웬만하면 정해져 있다. 또 각 공장들은 만들 수 없는 제품에 대한 의뢰가 들어오면 그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거래처를 소개해준다. 그래서 거래처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 회사는 다른 거래처에서 그런 소개를 받아 우리 회사에 직접 전화했던 것이고, 마침 일이 없던 차에 한 번도 거래를 하지 않은 곳이지만 다른 거래처의 소개로 하청을 받은 것이었다. 


(가) 회사의 일은 늘 (다) 회사를 통해 일을 받아왔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연락을 하진 않아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어느 회사의 일인지 정도만 파악하는 정도였고, 또 (가) 회사도 우리 회사가 재하청을 받아서 일하고 있다는 정도만 아는 수준이었다. 사실 (가) 회사가 하청을 주는 곳이 (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다) 회사가 하청을 주는 곳이 우리 회사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본인들이 일을 주는 곳은 우리 회사뿐인 것처럼 말을 하고, 또 자신들의 회사에만 충성(?)하길 바란다. 참...


(가) 회사에서 분풀이를 당한 (다) 회사 담당자는 또 우리 사무실을 찾아와서 분풀이 + 하소연을 하고 갔다. 물론 그거 다 듣고 있을 사장님이 아니다. 같이 맞짱(?)을 뜨며, 그럼 (가) 회사가 일을 많이 주던가, 돈을 많이 주던가, 하면서 같이 큰소리 내셨고, (다) 회사 담당자님은 '힝, 나도 몰라요~' 하고 휑~ 하며 가버렸다. 이렇게 현피를 뜨는 모습은 처음 봤던지라 속으로 '헐... 어쩌지?' 하며 이러다 거래처 끊기는 거 아닌가 했다. 그런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까 말했듯, (다) 회사가 하청 받는 곳이 (가) 회사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현피 뜨고 가셔 놓고 선 며칠 뒤에 또 오셔서 도면 펴놓고 일정 상의하고 가셨다. 이렇게 또 사업의 기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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