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isummersea Apr 27. 2020

대학원생에게 외장하드란?

소중하고도 소중한 녀석.

  외장하드를 믿지 않는다. 대학교 때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카메라를 전공으로 하는 학과는 아니었지만 학과에 다수 학생들이 DSLR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리움 속에 계시는 나의 외할아버지는 모든 손녀/자가 고등학교 3학년까지 무사히 공부를 마치면 수고가 많았다고 축하의 의미로 100만 원을 주셨었다. 나는 할아버지께 받은 돈으로 DSLR을 구매하고 대학교 4년 동안 수많은 사진들을 찍으며 외장하드에 저장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외장하드는 읽히지 않았고 모든 사진들은 다시 볼 수 없는 추억 속에만 저장되었다. 그때부터 외장하드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하락하였고 다시는 사용하지 않았었다.


  백업의 중요성을 몰랐다. 지도 교수님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백업을 늘 강조하셨다. 지금 사용하는 컴퓨터에 하나. 연구실 NAS(나스; 네트워크를 통해 자료를 주고받는 저장장치)에 하나. 그리고 나와 물리적으로 떨어진 공간에 하나. 최소 3곳에 자료가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나와 물리적으로 떨어진 곳은 왜 필요한가 싶었는데 연구실에 불이 날 수도 있으니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존경스럽기도 하고 살짝  피곤하기도 했다. 나의 석사 자료들은 교수님이 말씀하신 데로 내 컴퓨터에 하나, 연구실 NAS에 하나 저장했다. 물리적으로 떨어진 곳에 저장은 하지 않았다. 왜? 난 외장하드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박사과정 첫 논문을 한창 작업할 때 나는 신혼여행을 갔다. 첫 논문에 사용된 자료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30분 단위의 이산화탄소, 물, 메탄, 그리고 기상 정보이다. 자료의 양이 많다 보니 백업을 해야겠다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신혼여행에 들떠 있어 여행 후 자료를 백업하겠다는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다. 


  행복한 신혼여행 후 절망적인 현실이 다가왔다.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 연구실에 즐거운 마음으로 갔다. 사람은 역시 휴식이 필요하다며 연구실에 나가기 싫은 건 매한가지지만 덜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연구실 사람들에게 잘 다녀왔냐는 인사를 받으면서 컴퓨터를 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절전 상태인 컴퓨터를 깨웠다. 깨웠는데 이상하게 깨어났다. 영어로 적힌 이상한 경고문이 떠 있었다.


  '블라 블라 블라... 비트코인... 블라 블라 블라... 해킹을 풀고 싶다면 해당 메일로 나에게 연락해라. 만일 메일을 보내지 않고 혼자 해킹을 푸려는 시도가 있었다면 돈을 더 올리겠다... 블라 블라 블라...'


쉽게 말하자면 '넌 망했다 요놈아! ㅋ'의 내용이었다. 지금 글을 적으면서도 아찔하다. 두 눈이 질끈 감긴다. 그 경고문을 읽은 후 상황은 이해가 갔지만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 어깨를 툭툭 치며 현실 도피성 말투로 '이거 뭐야?'라고 했던 걸로 기억한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펑펑 울었다. 하지만 운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노트북을 구매했다. 사용하던 모든 프로그램들을 설치했다. 그리고 '제발 하나라도, 하나라도 건지자'라는 마음으로 메일함을 뒤졌다. 가장 최근에 보낸 원고를 다운받았다. 나와 같이 논문을 작업하는 박사님께 위에 언급한 30분 자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상황 설명 후 자료들을 공유받았다. 날아간 코드들을 다시 작성했다. 카톡으로 보낸 모든 엑셀 파일들을 다운받았다. 이 모든 것들이 완성되기까지 얼추 일주일이 걸렸다 (불행 중 다행히 내가 읽었던 논문들은 날아가지 않았다. 그마저 날아갔다면 정말 답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구실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백업을 해라고 말했다.


  1 TB 외장하드를 구매했다. 그 일이 있던 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매달 1일마다 외장하드에 나의 모든 자료를 백업한다. 작업하는 원고들은 Onedrive에 저장한다. 외장하드가 대학교 때처럼 고장이 날까 봐 하나를 더 구매해서 집에 둬야 하나 고민 중에 있다. 외장하드를 믿지는 않지만 이제는 소중하고도 소중한 것이 되어버렸다. 정말 잊지 못할 경험이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대학원생뿐만 아니라 컴퓨터 작업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컴퓨터를 잘 끄고 다니며 백업을 주기적으로 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구노트 작성은 어떻게 하는 건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