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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Mar 16. 2016

싱가포르 거닐기

2015년 여름 #0 출발 전

일 년에 한 번은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하겠다고 생각한 지 이 년째, 2015년 여름에는 싱가포르를 가기로 했다. 이래저래 날짜를 맞추어 보니 7월 초가 가장 무난할 것 같아서, 이것 또한 작년에 이어 비슷한 날짜가 되었다. 


싱가포르에 가는 건 두 번째였다. 

몇 년 전, 견본시에 참석하기 위해서 당시의 동료 두 명과 함께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나 현지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기에, 여전히 기억 속에 상당히 많은 장면들이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그 출장은 예전 회사에서의 마지막 출장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 출장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전혀 그것이 마지막이리라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다른 출장과는 달리 약간 스케줄이 느슨했기 때문에,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나면 같이 갔던 동료들과 함께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곤 했다. 머라이언을 보러 가기도 했고, 강가를 어슬렁어슬렁 산책하기도 했다. 강가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약간 습한 저녁 강바람을 맞으며, 그럭저럭 맛이 있는 피자와 파스타를 나누어먹었던 그 순간. 나는 문득 내가 하던 일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도달했다는 성취감을, 이유도 없이 느꼈다.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나는 싱가포르에 다시 '놀러' 간다는 데 저항감을 느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내가 선택한 이 현실의 순간에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시점의 나 역시 어떠한 것도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의 시점에서 내가 당시의 나를 혹독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이 약간 불편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농담 반으로 덧붙이자면 여행지를 선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들 나처럼 여권에 다르게 생긴 도장이 찍히기를 바라는 게 아닌가. 


하지만 결론은 싱가포르였다.

비교적 짧은 비행시간 및 짧은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는 않은 데다, 엄마에게 싱가포르의 사진을 보여드리자 당장 좋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곳의 사진을 보여드렸다 해도, 좋다고 하셨을 리라 장담하지만.


항공권을 예매했다.

갈 때는 저녁 출발-새벽 도착, 올 때는 낮 출발-저녁 도착 편. 싱가포르 항공, 인당 60만 원 정도의 비용. 

마음만 먹으면 왕복으로 밤 비행기를 타는 것도 가능했지만, 엄마와 일정을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깨닫게 된 교훈이 있다면, 갈 때 비행기에서 밤을 새우는 건 피로만 누적시킬 뿐이라는 거다. 특히 엄마는 비행기에서 거의 한숨도 못 주무신 것 같았는데,  눈이 새빨갛고 피로한 상태로 새벽부터 첫날 일정을 시작하게 되셨다. 물론 새벽에 도착한 덕분에 마리나 베이 샌즈를 배경으로 일출도 볼 수 있었고, 뭔가 스스로가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새빨갛게 눈이 충혈된 엄마에게 아침부터 문을 연 카페에서 시커먼 커피를 사드리면서, 나는 다음부터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할 때에는 밤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숙박을 예약했다.

나는, 그리고 나와 여행을 함께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가기로 했으면 일단 항공권을 예매하고 다음으로 전 일정의 숙박을 모두 예약한다. 

다들 소소한 걱정이 많은 편이라, 현지에 도착해서 숙소를 찾는 여행은 그리 성격에 맞지 않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모두가 이렇게 여행을 짠다고 생각했지만, 나와 여행을 함께 다니지는 않지만 여행을 자주 다니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총 3박 4일의 일정이었는데, 3박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예약했다.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각오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일단 우리는 마리나 베이 샌즈에서 하룻밤은 묵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센토사 섬에서도 하루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날을 마리나 베이 샌즈에 잡고, 마지막 날을 샹그릴라에 잡았다. 각각 40만 원대. 이 시점에서 이미, 여행지 선정 과정에서 마지막 후보까지 남았던 방콕과의 항공권 가격 차는 가뿐히 상회하는 지출이 발생했다는 걸 인식했다. 현지에서 쓰는 비용은 훨씬 적다는데, 방콕에 가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런 후회스러운 감상은 꾹 누르며, 싱가포르의 사진을 보며 마음을 북돋았다. 사진을 보면 또 여행지를 잘 정한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헤매던 중간 날의 숙박은 똑같은 센토사 섬의 뫼벤픽으로 잡았다. 사실은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샹그릴라에서 2박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결정을 내린 시점에서는 이미 공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뫼벤픽만은 국내 사이트를 통해서 예약한 것 같다. 다른 숙박 예약 사이트에 비해서 가격이 싸고 공실이 있었기 때문인데, 30만 원대로 예약을 했다.


조식은 중요하지만 필수는 아니다. 

리조트인 뫼벤픽과 샹그릴라는 조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마리나 베이 샌즈는 조식이 비싼 편인 데다 근처에 쇼핑몰이 일찍 문을 여니 아침을 먹을 곳은 있을 것 같아서 포함시키지 않았다. 예약을 한 후에는 각 호텔에 직접 컨펌 메일을 보냈다. 마리나 베이 샌즈는 호텔 사이트에서 직접 예약했기 때문에 답변이 일찍 왔고, 다른 두 곳은 며칠 정도 지나서 답변이 왔다. 사실 숙박 예약을 하고 컨펌 메일을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어쩐지 예약이 제대로 되었는지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컨펌을 받고서야 안심하며 현지로 갈 수 있었는데, 사실 도착을 해보니 그 불안은 높은 확률로 적중하고 말았지만.


다음으로는 환전을 했다.

은행의 동네 지점의 경우에는 엔과 달러 이외의 통화는 따로 취급하지 않는 곳이 많기 때문에, 전화를 해서 미리 싱가포르 달러가 있는지 확인했다. 2014년에 타이완에 갈 때만 해도 전화로 예약을 하고 출국일에 공항 지점에서 찾아가는 서비스를 받았는데, 1년이 지나서 문의해보니 공항 지점이 없어졌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직접 방문하기로 하고 싱가포르 달러를 취급하는지 물어보자, 그 지점에는 딱 천 달러가 남아있다고 했다.

그 동네 지점은 평소 거의 항상 사람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내가 환전을 하러 간 날에 한해서 엄청나게 사람이 많았다. 의자에 앉을 자리도 좀처럼 나지 않아서 구석에 멍하니 서서 책을 읽으며 기다린 지 한 시간 이상이 지나서야 창구에서 내 번호를 불렀다. 싱가포르 달러로 환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더니, 직원은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손님, 죄송합니다만 싱가포르 달러는 준비된 게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당황했다. 전화로 확인을 했다고 하니, 그제야 직원은 컴퓨터를 두드리며 보유분이 있는지 검색을 시작했다. 많은 손님들을 계속해서 상대해야 하는 피로감은 이해하지만, 검색 한 번 해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터인데 말이다. 만약 나처럼 미리 전화로 확인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직원의 보유분이 없다는 말에 그대로 납득하고 돌아서는 경우도 있을 듯했다. 

혹은 외화 보유분을 검색하는 건 나만 모를 뿐 무척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약간 지난 후, 직원은 지나칠 정도로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손님, 딱 천 달러가 있네요."

"아, 그럼 천 달러 전부 바꿔 주세요."

"14만 8천 원입니다."

"네? 14만 8천 원이요? 싱가포르 달러가요?"

나는 다시 한 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의 지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기를, 나는 놀라면 정말로 눈을 동그랗게 뜬다고 한다. 직원은 그런 내 얼굴을 보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모니터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그쪽도 화들짝 놀랐다.

"어머, 제가 홍콩 달러를 잘못 봤어요, 손님. 죄송합니다."

"아, 네."

앞으로 은행에서 환전을 할 때는 여러 의미에서 주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던 직원이 환하게 웃었다.

"어라, 싱가포르 달러는 천 달러보다 훨씬 많이 있는데요? 그래도 천 달러만 하시겠어요?"

"그, 그럴게요."

"천 달러 한 장으로 드리면 될까요?"

"아니요, 백 달러 지폐로 주세요."

갑작스럽게 선택지가 생겨서 당황하던 나는 천 달러 한 장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백 달러 지폐를 외쳤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지폐 열 장을 손에 들고 은행에서 나왔다. 뭔가 도깨비에게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 도착하고 나서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빨리도 소액권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티켓 자판기에서 지하철 표를 사려면 소액권 지폐 혹은 동전이 필요했고, 우리는 이리저리 헤매다가 어쩔 수 없이 계획에 없던 이지링크를 사게 된 것이다.


여행자 보험도 가입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가입하면 할인을 해준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만 먼저 가입하고, 엄마는 공항에서 가입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항의 가게들도 문을 닫는다.

룰루랄라 8시 20분 경에 공항에 도착해보니 공항 안이 썰렁했다. 알고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알기 전에는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다. 공항의 가게들도 문을 닫는 것이다.

가령 공항 내의 여행자 보험 서비스는 (2015년 7월 시점에서) 저녁 8시에 영업이 끝난다. 전화로도 가입이 가능하지만, 그건 평일 6시까지만 가능하다. 스마트폰은 시간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가입할 수 있는데, 공인인증서가 스마트폰에 들어있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밤의 공항은 적막하다.

낮에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 잘 느끼지 못했지만, 공항은 어마어마하게 넓다. 그렇게 휑뎅그렁하게 넓은 공간 안에 여기저기 불빛이 켜져 있고, 사람들이 드문드문 걸어 다닌다. 밥 먹을 곳도 기본적으로 9시에 문을 닫는 모양이라, 그 덕분에 버거킹이 엄청나게 붐비고 있었다. 자연스레 우리의 선택 또한 버거킹이 되었다.

우리는 운 좋게 마지막 버거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우리 뒤에 줄은 섰던 사람들부터는 음료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돌아서야 했다. "버거 다 팔렸어요.", "버거 없어요.", "버거 끝났어요." 하는 직원들의 외침을 배경음악 삼아, 옆 테이블 사람의 끊임없는 재채기를 추임새 삼아, 무언가 식량을 공급한다는 느낌으로 햄버거를 먹었다.

출국장을 통과해도 안은 썰렁했다. 어두운 복도에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었고, 면세품을 사라고 외치는 점원도 없었다. 자연스레 면세품 인도장을 찾아갔으나, 어떤 남자 하나가 정리 업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면세품──."이라고 입을 뗀 순간, 그는 나를 돌아보고 해당 게이트 쪽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그제야 문자를 확인해 보니, 평소와는 수령하는 곳이 달랐다. 나름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은 대체 몇 번을 엄마에게 "잠깐만.", "여기 아니래.", "안 한대.", "닫았네?"라는 말을 되풀이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다시 각자의 캐리어를 끌고 희미하게 불이 켜진 어두침침한 복도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불 꺼진 복도를 둘러보며 말했다.

"계절이 끝난 해수욕장 같네."


하지만 어떤 게이트는 북적거린다.

막상 출발 게이트 쪽으로 이동을 하자, 그곳은 외항사 특히 밤 비행기가 주로 출발하는 곳인지 단연 활기가 있었다. 여행 가기 전의 특유의 고양감이 다시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놓이자 처음으로, 내가 어딘가 불안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이 많았고, 레스토랑과 약국, 면세점도 문을 열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여기까지 와서 제대로 밥을 먹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이렇게 무언가 하나씩 알게 되는 거겠지.

문득 밤에 인천에 도착해서 배가 고픈 사람은 끼니를 해결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밤에 서울에 도착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곧바로 리무진 버스를 타러 갔을 뿐 뒤를 돌아서 공항 내 가게들의 영업 사정을 확인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입국장은 또 다른 밤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준비를 끝내고, 우리는 밤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싱가포르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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