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자연치유가 안 되나요?
주절주절 떠들어볼 텐데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뭐랄까 '사회는 왜 이렇게 썩었을까, 답은 없을까?’와 같은 고민. 내가 그걸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건 아니다. 그냥 이런 잡생각이 재밌기도 하고, 사회에 대해 깊게 고민해보는 것만으로도 나라는 사람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렇게 마구잡이로 써 내린 글을 다시 읽을 때, ‘아 나는 기저에 이런 전제를 깔고 살아가는 인간이군.’하는 반성(사실 진짜 반성은 잘 안 한다, 내 생각이 맞다고 우길 준비를 할 뿐이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회학도라서 좋은 점은 이런 뻘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교수님들이 있다는 점인 것 같다. 난 우리 과가 좋다. 아무튼 이렇게 흘려보낸 재밌는 생각들이 정말 셀 수 없이 많았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그래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서 내가 2022년에 뭘 했는지는 사진으로 다 알 것 같은데, 어떤 뻘 생각을 했는지 무슨 고민을 하고 살았는지는 까먹을 것 같아서 이제부터라도 써두기로 했다. 정기적으로 올라오진 않을 것 같다. 그럼 하기 싫어질 것 같아서. 그래서 공부하다가 공부하기 싫을 때 올리기로 했다. 사실 지금도 강의 듣다 글 쓰는 중이다. 히히 딴짓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워. 아무튼 시작해보겠다.
사회학도로서, 사실 혐오와 비난 사회적 갈등은 과동기보다 자주 마주치게 된다. 이 시대는 혐오의 시대이며, 이를 완화할 방법은 없고 이러다 다 죽을 거라는 암울한 얘기와 함께 끝난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종결하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비관적인 이야기. 문장의 앞부분도, 뒷부분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는 그 부분에 집중해서 해결책을 떠올려보고자 많이 고민했다. 그러나 이것이 해결책이라 당당하게 말을 할만한, 혁신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기엔 내 지식이 굉장히 부족했다. 물론 레포트를 제출하고 에세이를 제출하려면 결론부가 있어야 했기에 모두가 할 수 있을만한 당연한 이야기를 지껄였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보듬어주라는 전 국민 마더 테레사 화 프로젝트 언저리에 있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헤겔과 푸코라는 두 학자의 이론을 대립해보는 과정에서, 뭔가가 번뜩였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해결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 즉 ‘비관적인 이야기’라는 뒷부분이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대단한 아이디어도 아니고, 누가 보면 해결책이 아니라 될 대로 되라는 체념에 가까운 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인간이 어떤 문제가 커지기 전에 해결하겠답시고 떨었던 주접은 성공확률이 굉장히 낮은 것도 사실 아닌가? 고로 이 문제도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이런 조잡한 논리에만 기반해서 해결책이 필요 없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헤겔과 푸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헤겔은 역사를 단선적인 획득의 과정으로 본 학자다. 제국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사유 방식이다. 더군다나 식민지 시기를 거친 대한민국에서 이 학자의 이론이 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매도당하기 매우 적절한 사유이다. 고로 헤겔을 배운 이들은 자연스레 푸코에게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푸코는 이들의 단선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며 다양성이라는 키워드를 논쟁의 중심에 올려둔다. 단선적 사고방식에 상처받은 이들을 어루만져주는 아름답고 숭고한 반박이지 않은가? 그러나 단순히 헤겔이 악, 푸코가 선이라고 치환하여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사고방식이고 실제로 그런 이들도 많지 않을 것이다.
헤겔 스스로가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역사가 발전해왔다고 주장했듯이 헤겔 스스로의 주장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주장의 안티테제를 푸코의 주장이라고 보았을 때, 전테제는 무엇인가? 푸코의 주장을 안티테제로 삼음으로써 헤겔의 테제에서 모순점을 자각하게 된 것은 좋으나, 전테제 역시 푸코의 주장과 똑같을 것이라고 일축해버리는 것은 그 역시도 문제점이 있다. 정과 반의 충돌을 통해 새로운 무엇인가를 유도해내는 과정을 포기한 셈이다. 여기서 내가 생각한 합당한 전테제는 바로 ‘다양성 역시도 시간성이 존재한다’.라는 것이다. 푸코는 다양성을 환원 불가능한, 양립만 가능한 독자적 요소로 평했으나, 이는 너무 꽃밭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헤겔의 단선적 역사 평가 방식이 일리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이 꽃밭이 아니기 때문임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기 때문 아닌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상황을 기반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다양성 역시도 시간성이 존재한다’라는 나의 주장은 2022년 현대사회를 ‘발생 단계’로 정의한다. 기존에는 존중받지 못하던 여러 이데올로기들이 등장하여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기 시작한 시기. 물론 시작된 것이 현대사회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동시다발적이었던 적은 없을 것이다. ‘발생 단계’를 거치면 ‘저울질 단계’가 도래할 것이라고 본다. (이 네이밍을 고민하면서 본인의 작명 센스를 돌아보고 아이 이름은 꼭 작명소에 맡겨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는데에 성공했다.) 저울질 단계에서는 각각의 요소 혹은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져야 하는지 합의가 이루어지고, 기준점이 생긴다. 예를 들자면, 채식주의가 동물의 학대를 막고 환경오염을 줄어들게 한다는 유용성이 자라나는 어린아이의 단백질 섭취를 금하면서까지 추구해야 될 필요성은 없다는 사회적 합의 같은 것이 자라나는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메인 이데올로기가 될 수는 없다. 발생 직후에는 그들이 메인 이데올로기에 계속해서 도전하지만 결국은 저울질을 거쳐 안정화될 것이다. (즉, 그들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고려되어야 하는지가 암묵적으로 정해질 것이다.)
다만 현세태는 이런 발생이 우리가 한 번에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양으로 매일같이 나타난다. 고로 이 안정화 단계에 도달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세력다툼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이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세력다툼에서, 특정 성질을 공유하는 인간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경향성을 띄게 되고, 이 세력 다툼이 메시지간의 다툼에서 메신저끼리의 다툼으로 옮겨가 우리가 다루는 구분짓기와 혐오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로 이 다툼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또한 장기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자연 치유될 수 있는 현상일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포화상태에 다다른 그 시점부터는 기존 이데올로기의 안정화 작업이 진행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는 그럴 일이 절대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