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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별 Aug 20. 2022

사회생각 일지 (2)

삼각형에 고하는 작별

매번 글을 시작하기 위한 멋진 말을 고민하고는 한다. 내게 어울리지 않고 오글거린다는 생각에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망설인다. 그렇지만 이유가 뭐가 됐던 시도하기를 계속해서 망설이는 건 딱히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오늘은 글을 이렇게 시작해볼까 한다.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 무엇을 원한다는 문장에서 시작된다
얼마나 원하고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지 선택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결말을 만든다


내가 정말 사랑해 마지않는 웹툰 '닥터 프로스트'를 그린 이종범 작가가 웹툰 그리는 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한 줄 시놉이라는 방식을 택한다고 한다. '주인공이 무엇을 원하고 있다.'라는 단순한 문장에서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즉 욕망이 없는 주인공으로는 어떤 이야기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원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낼지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다만 안타깝게도 욕망은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캉의 <욕망 이론> 첫 장에 흥미로운 구절이 실려있다.

"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은 환유이다"

우리가 한 발짝씩 나아가 욕망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손에 들린 욕망의 결정체가 사실은 한 줌 모래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또다시 눈앞에 반짝이는 욕망을 발견한다. 욕망은 충족될 수 있는 욕구와 달리 무한하다.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면, 이 허상을 따라 걷는 것이 인생이라면, 제대로 이해하고 가능하다면 이용까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욕망은 대체 어떤 구조로 나를 움직이게 하는가. 


문화 콘텐츠와 창조적 상상력이라는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 강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별과제를 통해 하나의 짧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한 학기의 과제인 수업이었다. 멋진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수업을 듣고, 자료를 조사하며 노력했다. 특히 인간의 욕망에 대해 집중해보았다. 설득력을 가진 욕망을 설정해내지 않으면 우리의 이야기 역시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르네 지라르욕망의 삼각형 이론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글의 흐름을 툭 끊어내는 말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리고 사람 이름으로 놀리는 짓 유치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알지만, 학자 이름을 되뇌면서 웃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무튼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은 우리의 욕망이 '주체'와 '욕망'이라는 두 가지 요소만으로 이루어진 단선적 관계가 아님을 설명한다. 두 요소 사이에는 '매개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René Girard - Triangle of mimetic desire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매개자를 따라 걷는 것이다. 이 매개자라는 존재가 내가 실제로 바라는 목표의 위상에 가깝고 나와의 거리가 멀면 상관이 없다. 이를 지라르는 '외적 매개'라고 칭한다. 그러나 매개자가 내 주변에 있는, 그러니까 나보다 살짝 위에 있는 존재라면 문제가 생긴다. 이 '내적 매개'의 경우에는 매개자가 부럽기는 하지만 만만하고, 시샘은 나지만 따라잡기는 어려운 존재가 되어 주체를 끊임없이 괴롭히게 된다고 한다. 


그동안 나 역시, 내 매개자를 따라 걷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과 나를 비교하고, 그들을 투기하며 수많은 시간과 감정을 낭비한 것 같다. 가끔 찾아오는 이유 없는 상실감은 그런 행태의 반복에 대한 자연스러운 거부반응 아니었을까? 물론 그 매개자들을 따라 걸어온 나의 길이 나름 만족스러운 곳으로 나를 이끌었으니, 그동안 내 주변에서 질투 날만큼 치열하고 멋지게 살아준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다만 더 이상은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 


방법이 있냐고? 엉터리일지라도 아이디어는 항상 가지고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필요한 건 완벽한 계획을 위한 끝없는 고민이 아니라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행착오를 겪을 용기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사람이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필자 고유의 전통, 얼렁뚱땅 방안 제시하기로 글을 마무리하겠다. 지라르는 우리가 매개자를 시샘하다 결국 모방하게 된다고 했다. 매개자의 어깨너머로 언뜻 보이는 욕망을 쫓다가 결국 매개자를 쫓게 되는 것이다. 다만 욕망을 따라 걷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왜 우리는 욕망과 매개자, 그리고 나를 직선으로 이어놓고 생각을 하는 것인가? 매개자의 뒤에서 그를 모방하는 것으로는 매개자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깝던 따라잡을 수도 없다. 우리는 새 길을 따라 걷자, 우리에게 맞는 방법과 수단을 찾자. 잠시 방향을 틀어야 할지라도 녹지 않은 따스한 눈이 우리를 반기는 길에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자. 


그렇게 삼각형에 작별을 고할 것이다.  ¡Adiós, amigo mí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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