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모를 우울감이지 이유 없는 우울감은 아닌거잖아요?
번아웃, 무기력함, 우울함은 대학생들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듯하다. 실제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유 없이 찾아오는 우울감에 대한 당황스러움을 표할 때가 많다. 새벽시간대, 혹은 사람들과 신나게 논 다음날, 하루 일과를 끝마친 순간 등 경우도 다양하다. 그래서 이번 글은 '뜬금없는 순간에 우리를 찾아오는 이 우울감은 어디서 오는가? 해결방법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관한 내 견해이다. 내게 우울함을 토로했던 친구들이 조금이나마 답을 얻어갔으면 좋겠다.
바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 전에, 미신을 살펴보자. 사람들은 왜 미신을 믿는 것일까. 미신이 인류 생존에 도움을 줘왔다, 인과관계의 혼동이 미신을 만들어냈다 등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다. 다만 여러 의견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미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통제감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사실이 아닌 인과관계를 정립해내면서까지 인간이 얻으려고 하는 이 통제감이라는 감정은 대체 무엇인가?
통제감은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안전하다는 느낌, 의미 등과 연관되어있다. 규칙과 조직과 같은 수단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고로 예전부터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음을, 혹은 자신의 이 행동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기를 마음속 깊이 바라고 있었음을 이끌어낼 수 있다. 시험의 결과는 시험날 아침 먹은 메뉴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시험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통제감을 느끼기 위해, 미역을 먹지 않는 행위를 취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대학생들의 이유 모를 우울감은 통제감과 의미의 상실에서 기반한 것이 아닐까 한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우리 생애과정에 대한 완벽한 통제감을 쥐고 있었던 순간은 언제인가? 현재 자체로 의미가 충만했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그런 순간이 있기는 했는가? 졸업을 앞둔 대학생으로서 나는 내가 완벽히 내 삶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꼈던 적이 많지 않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불확실함이 공정성의 근간이 되는 시험을 준비하며 3년을 보냈고, 그 성적을 가지고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의 진학할 것인지도 나의 불확실한 선택이었다. 대학에 와서는 심지어 선택지가 더 넓어졌다. 살아간다는 것이 원래부터 모두에게 공평하게 불확실한 과정이겠지만은, 현대사회는 점점 더 변동이 심해지고 예측이 어려운 사회로 변하고 있다. '내가 진학은, 취업은 할 수 있을까?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곳에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러기 위한 제대로 된 노력을 하고 있는 게 맞을까?'라는 질문이 잦아지고, 이 질문의 빈도와 비례하여 현재의 통제감은 상실된다.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있지만 노력의 뚜렷한 목적성이 존재하지 않아 의미가 있다고 느끼지는 못한다, 혹은 노력과 통제를 아예 포기한 채 시간을 죽이기만 한다. 이런 반복이 번아웃과 우울의 학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어쩌라고, 힘든 원인을 안다고 덜 힘든 게 아니잖아.
타당한 지적이다. 그리고 본인 역시도 답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싫어하기에 저 상태로 글을 마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또 사회가 그러니까 우울한 건 어쩔 수 없지 하며 다른 요인을 탓하는 이야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통제감과 의미 발견이 어려운 것은 사회적 상황도 있지만 개인의 태도 문제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문단은 개인이 이에 맞서 취할 수 있는 수많은 해결책 중에 미완성에 불과한 내 개인적 방편을 얘기해볼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여 마치 전국 대학생을 내가 다 이해하는 듯 글을 쓸 예정이다. 양해 바라고,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미신의 존재 의의가 통제감과 의미부여였듯이, 자신의 생애과정에 대한 통제감을 상실한 우리들은 자신의 행동에서 의미를 찾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방법은 가치판단의 역전이다. 앞서 우리는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첫 번째 실수는 너무 거대한 상황에 맞서 통제감을 얻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그런 거대한 상황에 대해 우리가 완벽한 통제감을 가지려면 적어도 운명의 설계자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하루를 거대한 목표에 다가가는 노력으로 치환해서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냐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다.
두 번째 실수는 우리가 하고 있는 노력의 가치나 보내고 있는 하루의 가치를 후에 이룰 성공과의 연관성에서 찾는 것이다. 이것이 타당하다고 보지 않는다. 애초에 후에 이룰 성공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는 겪어보지 않은 지금의 우리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불확실한 개념에 기초하여 현재가 무의미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열심히 노력하며 고뇌하는 나라는 이미지에 취해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고로 이 실수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제안하는 것이 바로 가치판단의 역전이다. 미래나, 타인의 반응과 같은 기준으로 나의 하루를 평가하던 방식을 던지는 것이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서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읽는다면 이해가 훨씬 쉬울 듯하다.
“자네가 극장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해보게. 그때 극장 전체에 불이 켜져 있으면 객석 구석구석까지 잘 보일 거야. 하지만 자네에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바로 앞줄조차 보이지 않게 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네.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 과거와 미래가 보이겠지. 아니,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 하지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스포트라이트를 무대가 아니라, 다른 곳에 비추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아닌가? 세상에 어떤 공연이 스포트라이트를 관객석에 비춘 다음에 관객의 반응을 살피려고 할까? 이런 태도는 조금 지양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사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 더 언급하고 싶지만 글이 너무 잡다해질 것 같아서 다음번에 다루도록 하겠다. 아무튼 스포트라이트를 내가 서있는 무대에 비추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공연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통제감과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은 우리의 시선이 이상한 곳을 향하고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유 모를 우울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