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젊을 때 많이 다니세요

비 오는 날 식물원

by 여름햇살

식물원관람 일정이었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가이드가 급하게 식물원 대신 공연을 보자고 권했는데 모두들 불만인 듯 술렁이기 시작했다. 전날 서커스관람에서 졸다가 공연장 밖으로 나와 보니 다른 이들의 표정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결국 비를 맞으며 식물원관람을 했다.

곧 그치길 바랐지만 비는 오히려 굵어졌다. 넓은 식물원에서 장난감자동차 같은 전동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옆이 뚫려있어 가장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비를 막아야 했다. 우산을 쓰고 가이드의 뒤를 따라 식물은 보지도 못하고 앞사랑 등만 보며 걸었다. 그 와중에도 잠깐식 사진을 찍는 대단한 일행들도 있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를 말없이 걷던 가이드가 갑자기 뒤를 돌며 말했다. "도저히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라며 돌아가자고 했다. 모두들 바짓자락이 무릎까지 젖어있었다. 등에 멘 가방도 비를 맞아 안에 있던 내용물들이 눅눅해져 있었다. 아무도 말을 못 하고 다시 비를 맞으며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이번엔 의자까지 젖은 전동차를 타고 열대식물원 쪽으로 이동했다. 비가 그쳤다. 거대한 선인장들과 함께 동네에서도 봤음직한 작은 선인장들이 조화를 이루며 있었다. 같은 듯 다른 모양이었다. 공연 보기 싫다고 식물원을 강행했다가 비에 쫄딱 젖어 괜히 그랬나 싶었지만 나중엔 다 추억이 될 거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돌아가는 길, 인원이 많아 자동차를 한 번에 탈 수 없어 나눠 타게 되었다. 가이드가 일행 몇 명과 남으며 우리에게 처음에 탔던 곳에서 내리라고 했다. 과연 탔던 곳을 기억할 수 있을까. 엄마 손 놓친 아이들처럼 우리는 버스가 서는 곳마다 열심히 살펴야 했다. 버스에서 모두 부부끼리 앉았는데 아저씨 한 분만 혼자 앉아 있어 의아했다. 익숙한 곳이 나와 내리려고 하니 일행 한 명이 더 가서 내려야 한다고 말해 우리는 그냥 앉아있었다.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5분쯤 지났을까. 여기서 내려야 할 것 같다고 술렁이며 눈치를 보며 내렸다. 그제야 차가 움직였다. 분명 우리가 탈 때 가이드가 기사에게 뭐라고 당부하는 것 같았는데 '여기서 내려라'하고 손짓, 눈짓이라도 할 수 있지 않나?

공항 출입국장 들어갈 때 생각이 났다. 오른쪽 검지 올리세요. 올렸다. 몇 번을 반복했다. 아뿔싸! 오른손 올리라면 잠깐 생각해야 올리는 나는 왼쪽 검지를 반복해서 올리고 있었다. 출입국직원은 어떤 눈치도 주지 않았다. 샤먼 사람들은 알아서 할 때까지 기다리나 보다. 인내심이 끝내주는 걸까. 우리 같으면 속 터져서 가만있지 못할 텐데 말이다.


내린 장소에서 우리는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잠시 뒤 가이드가 다른 일행들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모두들 안심하는 눈치였다. 버스에 혼자 있던 아저씨의 아줌마가 아저씨를 보고 나무라듯 말했다. "아니, 와이프를 두고 혼자 가?" "당연히 뒤에 따라오는 줄 알았지" 아줌마는 웃으면서도 계속 구시렁거렸다. 아저씨도 민망한 표정으로 웃었다. 남편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너였으면 두고두고 말했겠지?" "그럼, 두고두고 말해야지." 분명 내가 그럴 거라는 걸 잘 안다.

아저씨와 아줌마가 우리를 보며 웃었다. 조용한 이들의 작은 구시렁거림이 듣기 좋았다.

비를 맞아 옷이 젖어도, 남편이 혼자만 타도, 자동차 기사가 내리라는 말을 안 해도 불평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그래서 계속 여행할 수 있나 보다. 그 부부는 60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헤어질 때 우리에게 말했다. "젊을 때 실컷 다니세요. 나이 드니 힘드네. 우린 실컷 다녔는데도." 사실 이번 샤먼여행은 버거웠다. 일정이 너무 많았고 서툰 가이드는 일정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였다. 매일 밤늦게 들어가고 아침 일찍 나왔다. 그들에 비하면 어린아이격인 우리도 지쳤는데 어르신들이 참 잘 견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다면서도 여전히 길 위에 있는 사람들. 실컷 다녔기에 이제는 그만해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비에 젖고 일정이 꼬여도 그저 허허 웃으며 다음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어쩌면 여행이란 목적지에 도착해 근사한 풍경을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는 줄곧 내가 제주라는 섬에서 나고 자랐기에, 섬사람의 갈증이 나를 여행지로 떠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지에 살고 실컷 여행 다녔지만 나이 들어도 여전히 낯선 길 위에 서는 그 어르신들을 보며 여행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닐수록 더 좋아지는 '지독한 중독'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컷 다녔기에 이제 그만 머무르고 싶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다녀본 사람만이 그 고단함 뒤에 숨은 여행의 맛을 알게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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