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면 바다로
점심에 남편과 김밥맛집에 갔다. 남편은 점심으로 짬뽕을 먹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짬뽕이 먹기 싫어서 평소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읊었다. 고기국수, 보말칼국수, 라면에 김밥, 정식.... 정식은 내가 좋아하는 메뉴다. 남편은 정식만 쏙 빼고 고민하다가 라면에 김밥을 골랐다.
나는 라면 한 개를 다 먹어 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하나 다 먹고 싶었다. 어제 바닷가 편의점에서도 한강라면 두 개를 사려고 했는데 남편이 자기는 안 먹겠다며 한 개만 사라고 했다. 그래놓고 먹었다. 오늘은 고집부려서 한강라면 두 개를 끓였더니 대신 김밥은 한 줄만 시키라고 했다. 새우튀김김밥도 먹고 싶고 매운멸치김밥도 먹고 싶어 고민하다 결국 새우튀김 김밥으로 골랐다. 나는 김밥 세 조각을 먹었고 라면도 남겼다. 원래는 남편이 많이 사려고 하면 내가 못 사게 했는데 요즘은 반대다. 다이어트 부작용인지 자꾸 음식에 욕심을 낸다. 마치 몸에서 그동안 못 먹은 거 한꺼번에 다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것 같다. 남편은 나머지 김밥과 자기 라면, 내가 남긴 라면까지 다 먹었다.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와서 좋다고 생각하는데 옆자리 여행객이
"눈이 이렇게 와"
라고 했다.
제주의 눈은 옆으로 온다. 담장에도 옆구리에 먼저 쌓인다. 제주사람들 눈에는 당연한 풍경이지만 여행객들은 신기해한다.
가족들과 충남에 갔을 때 보았던 눈이 떠올랐다. 눈이 너무 얌전하고 착하게 내렸다. 서울살이 하는 큰아이도, 대전살이 하는 둘째도, 제주토박이인 우리 부부도 모두 신기해하며 한참을 쳐다봤다. 제주의 눈은 악을 쓰며 모질게 오는데 육지의 눈은 세상 밝은 모습으로 왔다.
눈 오는 날 제주의 바다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3년 전 우연히 눈 오는 바닷가 카페에 갔다가 눈 오는 바다를 본 이후 눈이 오면 저절로 바다로 향하게 된다. 오늘은 오랜만에 동쪽 바다로 갔다. 가는 길에 눈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바닥을 훑었다. 웬만하면 반응 안 하는 남편도 무슨 일이냐며 놀란 눈을 했다.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앞이 안 보였다.
구좌읍 한동리에 있는 카페에 도착했다. 몇 번을 가도 자리가 없어 돌아왔었는데 날이 궂어서인지 자리가 많았다. 커피를 시키고 창가에 앉으니 몸에서 자꾸 달디단 디저트를 내놓으라고 했다. 주문할 때 오메기쑥케익을 먹고 싶었는데 남편이 배부르다며 안된다고 했다. 남편이 아빠처럼 굴었다.
좀 전에 내가 남긴 라면 먹어줄 때는 좋았는데 그것 때문에 배불러서 디저트를 못 먹는다고 하니 라면 두 개 끓인 게 후회됐다. 하지만 오늘 라면 한 개를 다 차지하지 않았으면 나는 계속 라면하나를 다 먹고 싶었다고 할 것이다. 쑥케익도 분명 딱 두입만 먹으면 그만 먹고 싶어 질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억지 부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구천 원이 넘는 걸 사서 두 번 먹고 남기기엔 난 돈이 아까운 오십 살이다. 남겨서 포장하면 집에 와도 먹을 사람은 나 밖에 없기 때문에 뒹굴리다가 내 손으로 버려야 한다. 아깝다고 싸 온 건 대부분 그런 식으로 처리된다. 남편이 잘 먹을 때가 좋았는데.
매섭게 눈보라 치던 바다는 어디 갔는지 해와 함께 맑은 바다가 빼꼼 나타났다.
'와, 날씨 정말. 그래, 이게 제주 날씨지!'
혼자 생각하는데 옆자리 여행객이 한마디 했다.
"날씨가 무슨 영화장면 같아."
그게 제주의 눈바람 날씨다. 눈이 쌓이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한편으로 눈이 오면 아직도 너무 신나는 오십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