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간의 워홀, 나는 얼마나 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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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좋아하는 마음엔 실패가 없지> 의 저자 장참미 작가님과 함께 창원 '오누이 북앤샵'에서 반년 간 글쓰기 모임 활동을 이어간 적 있습니다. 당시 모임에 제출했던 글 중 일부를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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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일 년간의 캐나다 워홀이 끝났다.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세상 무너질 듯 서럽게 울던 귀국 날로부터 반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어느덧 선선한 가을이 왔다. 늦은 점심으로 뭘 먹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냉장고를 열어 김치를 꺼냈다. 꺼낸 김치를 작은 접시에 옮겨 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한국인이지만 한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워홀을 가기 전만 해도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치보다는 피클을, 밥보다는 빵과 파스타를. 엄마가 딱 한입만 먹어보라며 끈질기게 권해오는 각종 파김치니, 깍두기니 하는 반찬에도 매번 새침하게 흥, 하고 고개를 돌려 그를 애타게 만들곤 했던 나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종종 고해성사라도 하듯 '실은 난 매운 음식과 김치를 좋아하지 않아.' 하고 털어놓고서, 뒤이어 돌아오는 반응을 은근스럽게 즐기기도 했더랬다. '릴리, 네가 그러고도 진짜 한국인 맞아?' '응, 맞지.'
캐나다에 도착한 후 한동안은 시리얼과 토스트, 요거트와 꿀, 계란과 베이컨으로 식사를 때우며 전형적인 서구 식단에 길들여져 젓가락질하는 법조차 잊어버리겠다 싶을 즈음, 당시 일하던 한식당에서 어느 날 내게 점심 메뉴로 비빔밥을 만들어 내주었다. 그건 근 한 달여 만의 제대로 된 한식이었다. 윤기가 차르르 도는 비빔밥을 숟가락으로 크게 한입 떠서 입안에 밀어 넣은 나는, 그만 속으로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다. 왜 진작 몰랐을까. 한식이 세계 최고였다는 걸. 비빔밥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다니! 그 눈물은 '참나, 한국인들은 대체 왜 기껏 해외까지 나가서 죄다 김치를 먹고, 육개장 따위로 식사를 때우는 거야? 촌스럽게.' 라며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이던, 뭣도 모르던 과거의 나에게 딱밤을 콩 때리며 흘린 참회의 눈물이었다.
그 후로 나는 종종 아시안 마트인 페어웨이 마켓(Fairway Market)에서 손바닥 만한 김치나 깻잎 한 팩 따위를 만 원 가까이 주고 사 먹곤 했다. 물렁하게 푹 익은 아보카보를 넣은 야매 비빔밥을 만들어서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한국인 친구와 나눠 먹거나, 한식을 좋아하는 외국인 친구를 데리고 점심엔 파전에 막걸리를, 저녁엔 한국인이 운영하는 치킨집에서 양념치킨과 오뎅탕을, 한 병에 (무려) 만 칠천원씩 하는 소주를 시켜 먹기도 했다. 한인 마트에서 가격이 한국의 세 배 가까이 되는 미미네 떡볶이 한 팩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곱씹기도 했다. 한국에서 만원 언저리면 사먹을 수 있는 냉면을, 김밥과 라면을, 보쌈 정식을, 된장찌개의 뜨끈하고 고소한 향기를. 한국에 돌아가면 진짜 매일매일 김치 매끼마다 먹고 살아야지. 무말랭이도 먹고 깻잎도 먹고 고추장이랑 참기름이랑 깨도 아끼지 않고 팍팍 넣어서 비벼 먹어야지. 그렇게 다짐했고, 그리고 실제로도 한동안 그렇게 했다.
가을에 들어서자, 이제는 쌓인 반찬통을 봐도 손이 잘 가지 않고 그저 시큰둥하다. 다짐했던 ‘김치 사랑’은 언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건지. 이제는 달에 고작 한두번이나 먹을까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것들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게 아닐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고, 잃고 나서 깨닫는 소중함은 다시 되찾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발끝으로 슬며시 저 멀리 밀어두는 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성인 것 같기도 하고.
적지 않은 수의 워홀 유경험자들이 말하듯, 1년은 영어를 드라마틱하게 늘리기에 긴 시간이 아니다. 매달 스스로 월세와 생활비를 벌고 끊임없이 영어와 씨름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나 같은 워홀러 신분 외노자에게는 더더욱. 친구와 노는 대신 자기계발과 영어 공부를 택하는 금욕적 삶은 어쩐지 낭비처럼 느껴진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방패 삼아 일 년간 참 열심히도 놀았다. 그래서인지 잘 자고 잘 먹어서 동글동글 불어난 볼살과는 달리, 내 영어 실력은 귀국하기 전과 비교해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여전히 기본적인 문법이 헷갈렸고 고작 이것도 모르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며 머리를 자주 쥐어뜯었다. 아주 간단한 문장조차 목에서 턱 막혀 식은땀이 뻘뻘 날 때도, 번역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도 여전히 종종 찾아온다. 그러니 1년은 사람을 180도 바꿔 놓기 충분한 시간은 더더욱 아니다. 그야 한식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과 별개로, 내가 대단한 한식 사랑꾼이 된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꼭 완전한 탈바꿈만이 변화일까. 아니다. 비록 고치를 깨고 나오기 전의 번데기라 할지라도, 나비가 되겠다고 결심했다면 그도 그 나름대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서의 나는 상대방과 되도록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화할 때 늘 코나 입 언저리를 보았고, 마스크를 끼면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서 무척이나 편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캐나다는 눈맞춤과 리액션 없이 살아남기 힘든 가혹한 인싸들의 세계. 샤이한 동양인 걸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더 많은 팁을 얻기 위해, 내 나름대로 부던히도 노력해왔다. 먼저, 서브웨이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아이컨택의 달인이 됐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누군가와 눈이 맞으면 입꼬리를 양옆으로 쭉 끌어당기며 하이, 하왈 유 투데이?를 외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적재적소에 눈을 마주치고 예쁘게 미소짓는 것쯤 piece of cake, 식은 죽 먹기. 경제관념도 조금은 달라졌다. SNS 자랑용으로 비싼 인테리어 용품을 뒷일 생각 않고 구매하다 통장에 구멍이 아주 뻥, 뚫리고 나서부터는 다시는 소중한 돈을 허투루 낭비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처음으로 지독한 짝사랑을 겪고서 특별함과 특이함을 혼동하여 마음을 헐값에 내놓지 말자는 교훈을 얻었다. 인간관계는 난로처럼 대해야 한다는 말의 진가를 몸소 깨달았다. 등산과 걷기 운동을 좋아하게 됐다. 자연을 통한 건강한 스트레스 해소법을 배웠다. 한국에서의 주된 스트레스 해소법인 술과 클럽, 폭식에 새삼스레 경각심이 들었다. 해가 지기 전 닫는 상점들, 편안한 표정으로 여유를 즐기는 노인과 장애인들을 보며 진정한 선진국이란 무엇인지 고찰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캐나다에서 머문 1년은 내게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어떤 내가 되고 싶은지 명확하고 선명하게 그려보는 계기이자 인생의 분명한 전환점이 되었다.
내년 3월 말, 나는 호주로 두 번째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 이번에는 남자친구도 함께. 상황이 잘 맞물린다면, 아마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은 숙소에서 머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작년, 인천공항에서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내 선택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으로 가득 차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되어 비행기에 오르던 그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호주에 갈 때는 그때처럼 마냥 두렵지 않을 것이다. 동행이 생겨서가 아니라, 아니 동행이 생겨서도 있지만,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의 명확한 한계와 그것을 뛰어넘는 잠재력, 운과 노력은 때때로 배신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의 초연함. 유연함의 필요성, 각종 변수에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대처하는 마음가짐 같은 것들을. 때로는 거지 같은 날과 개 같은 놈들이 나를 울게 만들고, 또 때로는 말도 안되는 크기의 행복과 생전 처음 느끼는 평온함이 나를 시도때도 없이 깜짝 방문할 거라는 예감. 그리고 어차피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으니 로망은 버리되 호기심만은 잃지 않겠다는 열린 마음까지도.
캐나다 워홀을 통해 얻은 가장 소중한 사실 한 가지는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단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 한국에서의 삶이 지겨워지면 나는 언제든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를 모르고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새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 그 사실이 나에게는 오늘도 큰 위안이 된다. 숨이 막힐 때마다 룰렛을 돌리듯 여기 아니면 저기, 내가 살고 싶고 살게 될지도 모르는 나라들을 하나하나 짚어보게 된다. 그렇게 내 안의 용기를 느낄 때면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일년 전 나와 지금의 내가 참 많이도 달라졌다는 걸. 나는 원한다면 언제라도 고치를 힘껏 깨고 나와 날개를 훌훌 펼치고 날아갈 나비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