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상자에 들어가지 마오>

mbti 맹신론자의 말로는, 이렇습니다

by 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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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좋아하는 마음엔 실패가 없지> 의 저자 장참미 작가님과 함께 창원 '오누이 북앤샵'에서 반년 간 글쓰기 모임 활동을 이어간 적 있습니다. 당시 모임에 제출했던 글 중 일부를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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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형, 별자리, 사주팔자를 넘어 바야흐로 MBTI의 시대가 도래했다. 처음 보는 상대에게 MBTI 테스트 해보셨어요? 하고 물으면, 반응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뉜다. 기다렸다는 듯 제 엠비티아이는 OOOO이에요! 하고 반짝반짝한 눈으로 외치는 타입과, 검사 안 해봐서 몰라요, 그거 다 가짜(?)잖아요. (이건 그냥 성격유형 검사인데 어디가 가짜란 거지?)하고 시큰둥하게, 심지어는 좀 환멸난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는 타입. 이중 나는 정확히 전자의, 그것도 한술 더 떠서 흔히들 '엠비티아이 과몰입’이라고 부르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과장 좀 보태 우리는 열 중 아홉은 자신의 엠비티아이를 알고 있는, 그야말로 <엠비티아이가 장악한 시대>를 살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각종 SNS부터 마케팅 문구, 공중파 예능은 물론 심지어 지원 자격에 '특정 엠비티아이는 지원서를 내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된 채용 공고문까지 올라올 정도로 MBTI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는 처음 만난 상대의 MBTI를 묻거나 추측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Mbti 유행에 한동안 푹 빠져살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시들해진 이유가 있는데, 그건 바로 상자에 갇힐 뻔 했던 경험 때문이다.






작년, 멀고 먼 땅 캐나다에서 나는 독감보다 더 지독한 짝사랑을 겪었다. 상대는 나와 동갑의 한국인 남자애였다. 그때의 나는 아직 특이함과 특별함을 구분하지 못했고, (바보 같게도) Mbti를 마치 인간관계에 대한 모든 해답을 내려줄 만능 열쇠로 여기는 어리숙한 인간이었다. 어찌어찌 그의 엠비티아이를 알아낸 나는, 곧바로 온갖 포탈사이트에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엔팁 이상형, 엔팁 짝사랑, 엔팁이 좋아하는 유형, 엔팁의 호감 신호.... 그래서 나온 결과를 종합해보자면, '엔팁'의 이상형은 이랬다. 순하고, 내향적이고, 조용하고 똑똑하고 지적이고 귀엽지만 섹시할 땐 섹시한 여성.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나와는 정 반대인 여자.




그때의 나는, 아주 우습게도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야 '내가 생각하는 나'를 묘사해보자면 이랬으니까. 잘 까불고, 촐랑거리고, 금세 흥분하고, 때때로 시끄럽고, 자주 본인의 무지함에 괴로워하는 사람. 동시에 은밀하게 세상 물정에 밝고 현명한, 성숙한 어른 여성이 되는 망상을 하며 입꼬리를 씰룩대는-동시에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자조하던-인물. 그런 내게는 오래 전부터 스스로에게 종종 되뇌이곤 했던 문장이 있었다. '상자에 들어가지 마.' '절대로, 상자에, 들어가지 마.'




설명해보겠다. 사람은 자신의 모양에 맞는 상자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별 모양으로 태어났는데 아무리 네모난 박스 안에 억지로 몸을 구기고 들어간다 한들 결국 언젠가 상자를 찢고 뾰족하게 튀어나올 운명이다, 라는 게 내 오래된 지론이었다. 남이 아닌 스스로가 되자. 나는 나밖에 될 수 없다. 그 만고불변의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결국 그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 앞에 무릎을 꿇고 상자 속에 몸을 구겨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음날부터 나는 그가 원하는 -혹은 원할 것이라 추측되는- 이상형을 어설프게 흉내내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은 나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 애보다 못났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자괴감에 주눅이 들었고, 자신감은 바닥쳤고, 태도는 점점 소심해졌다. 자아가 금세 형체를 잃고 희미해졌다. 그래서 정말로 못나고 매력적이지 못한 사람이 되어갔다. 이런 악순환이 한동안 이어졌다. 끝은 뻔했다. 그 멀고 먼 땅에서조차 하필 한국인을 짝사랑한 죄로 너덜너덜한 눈물샘을 얻게 된 나는, 어느 정도 치유의 시간이 흐른 뒤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앞으로 내 인생에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걸. 내 원형을 유지하는데 온 마음을 기울이고, 특이함과 특별함을 혼동하여 내 가치를 잊지 않도록 하겠다는 걸.





모든 짝사랑 혹은 연애가 그러하듯, 돌이켜보면 그다지 멋지고 대단찮은 상대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그 애 앞에 선 내 스스로가 작아보였는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기분을 꼽자면 '나를 부정하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이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건 정말이지 온 몸이 끈적끈적하게 녹아버리는 독약을 들이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신 떠올리기 싫을만큼 끔찍한 경험이었다는 얘기다.







그리하여 이제는 MBTI라는 한없이 가벼운 수단 대신 그 사람 자체를, 어떤 필터나 프레임 없이 똑바로 관찰하고자 노력한다. 애정이 담긴 느린 시선으로 아주 오래오래. 그리고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라도 내 스스로를 갉아먹지는 말자고, 아무리 멋지고 잘나고 대단해보이는 사람도 나 자신보다 더 값진 존재일 수는 없다고. 그 사실만큼은 잊지 않게끔 매번 되새기고 있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여전히 MBTI를 완전히 놓아주지 못했다. 누군가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그의 알파벳 4자리를 유추하거나, 심심할 때마다 유튜브에서 은근슬쩍 남자친구의 엠비티아이를 검색해보곤 하니까. 그래도 좀 예쁘게 봐주면 안될까. 이런 얄팍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당신과 나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 애정과 호감을 이끌어 내고 싶을 뿐인데. 물론 편법은 어디까지나 편법. 상대방의 원형을 낱낱히 알고자 한다면 이제는 MBTI라는 프레임은 놓아줘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상자 속에 들어가지 않고도 내 원형 그대로 사랑받고, 당신의 본질 그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








어라, 그런데 당신. 이 글을 보고 끄덕끄덕 고갯짓하고 있는 걸 보니, 혹시 IN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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