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에게 / 아무것도 몰랐기에 선뜻 도전할 수 있는 마음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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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좋아하는 마음엔 실패가 없지> 의 저자 장참미 작가님과 함께 창원 '오누이 북앤샵'에서 반년 간 글쓰기 모임 활동을 이어간 적 있습니다. 당시 모임에 제출했던 글 중 일부를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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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는 어느덧 출국을 일주일 앞두고 있어. 시간이 어찌나 쏜살같이 흐르는지 이러다 눈 깜빡하면 호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만 있을 것 같아.
벚꽃이 흩날리는 봄 동안 나는 출국 전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부지런히 지워나갔어. 짐 싸기, 방 정리하기, 숙소 예약하기, 할머니와 할아버지, 친척들을 만나 작별인사 나누기⋯ 그리고 남해에 가보기.
1박 2일 동안 보았던 남해는 듣던대로 아름답고 한적한 마을이었어. 소심하게 피어난 샛노란 목향장미와 포도송이 같은 등나무꽃 아래에서 사진도 찍고, 알프스가 떠오르는 푸른 언덕이 있는 양떼목장에서 아기 양들에게 배춧잎도 주었어. 살아있는 양의 털은 처음 만져봤는데, 느낌이 후리스랑 똑같더라. 이제는 ‘전 남자친구‘가 되어버린 J와 이 양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그런 이야기들도 나눴어. 아, 혹시나 네가 남해에 오게 된다면 상주은모래비치는 꼭 가봤으면 해. 에메랄드색 해변과 노란 유채꽃의 대비가 어쩐지 서글퍼질 만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한참을 그 앞에 멍하니 서있다 돌아왔거든.
여행을 다녀 와서는 J와 각자의 가족을 소개하는 자리도 가졌어. 어떤 날에는 J가 우리 엄마를, 어떤 날에는 내가 J의 아빠를 만나 인사를 드렸어. 연인의 가족을 만나는 건 우리 둘 다에게 처음이었어. 근데 나보다 J가 훨씬 더 긴장해서, 지켜보는 나는 마냥 즐겁더라. 또 어떤 날에는 우리집 강아지의 배와 발바닥에 얼굴을 묻고 한참이나 냄새를 맡았어. 이 구수하고 따뜻한 냄새를 최대한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어. 한식도 기회가 될 때마다 원없이 먹었어.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제대로 된 한식을 사먹을 기회가 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어떤 날에는 갑자기 모든 게 다 귀찮고 내려놓고 싶어서 한참을 침대에 누워만 있었어. 아, 뭐 꼭 떠나야 하나, 집 나가면 개고생인 거 뻔히 아는데, 하면서.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뉴스들이 꼭 하나씩 귀에 들어오더라고. 내가 왜 이 나라를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는지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그런 어둡고 암담한 이야기들이 말이야. 도망친 곳에 낙원 없고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지만, 글쎄. 나는 정말로 그 말이 맞는지 이번에도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많고 많은 목록 중 가장 오랫동안 미루었던 일을 하나 꼽자면 바로 '사랑니 뽑기' 였어. 캐나다에 가기 전 윗니 두 개를 뽑았고, 이번에는 아랫쪽에 있는 사랑니를 뺄 차례였어. 웃긴 게 뭔지 알아? 예전에 SNS에서 화제가 된 '매복 사랑니 네 개를 가진 사람'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와, 너무 불쌍하다, 어떻게 사랑니가 네 개야? 하고 웃으며 넘겼던 기억이 있거든? 근데 알고보니 그 불쌍한 사람이 바로 나더라. 하하.
본격적으로 아랫니를 뽑으려는데, 잇몸과 입천장에 마취 주사를 세 방이나 맞고도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어. 설마 마취가 잘 안 됐나? 싶었지. 알고 보니 아랫니는 없애기도 까다로울 뿐더러 고통도 더 크다고 하더라. 애꿎은 손등을 손톱으로 꾹꾹 눌러가며 어서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쩐지 사랑니 빼러 왔어요, 하는 목소리가 너무 쾌활하더라.“ 원장님이 그렇게 말하며 웃으시는 거 있지. 그리고는 웃음 뒤에 이렇게 덧붙이셨어. “근데, 그래도 이만큼 아플 걸 몰랐으니까 그렇게 선뜻 뽑으러 올 수 있었던 걸지도 몰라."
사랑니 뽑기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나서도, 그 말이 어쩐지 계속 머리에 맴돌았어. 퉁퉁 부은 볼을 아이스팩으로 감싸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나는 곱씹었지. 아무것도 몰랐기에 선뜻 도전할 수 있는 마음에 대해서.
캐나다에서의 일 년을 떠올리면 늘 행복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어. 다짜고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엉엉 울어버리고 날도 분명 있었거든. 그런데 요새 들어 그 모든 일이 지나고 보니 다 필요한 과정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만약 누군가 그 모든 희노애락의 과정을 모두 알면서도 다시 겪으라면 겪을 수 있겠니, 하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YES라고 외칠 수 있을 만큼.
이번 호주 워킹홀리데이도 그래. 틀림없이 상상도 못했던 수많은 불행과 위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나 아플 줄 몰랐기 때문에 용감하게 뽑을 수 있었던 사랑니처럼, 일단은 눈 딱 감고 뛰어들어 보려고 해. 많이 아플 걸 알지만, 또 여전히 많이 두려운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화이팅, 하고 웃는 얼굴로 손 흔들어 주면 좋겠어. 내가 더욱 더 큰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어느새 새벽이네. 편지는 이만 줄일게. 부디 먼곳에서나마 나를 응원해주었으면 해. 사랑니를 뽑고 남은 자리가 너무 시큰하게 느껴지면, 종종 널 찾아올게. 잘 지내, 우리 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