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을로 돌아가고 싶어 #2. 피츠로이 하산기

엘 찰텐, 파타고니아, 아르헨티나

by 썸머애프터눈

어지럼증이 가라앉고 돌무더기를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동이 터오자 해는 빠른 속도로 떠오르고 있었다. 붉게 물든 피츠로이를 보고 싶은 욕심에 마음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지만 몸은 겨우 뒤꽁무니를 쫓았다. 피츠로이 트레킹은 마치 일부러 짜놓은 듯한 완벽한 서사를 지니고 있다. 초반 구간에서 피츠로이는 저 멀리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중반쯤 카프리 호수를 지날 땐 호수와 어우러져 완벽한 풍경을 보여주고 후반에는 아예 자취를 감추고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작은(?) 언덕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 사실 피츠로이 턱 밑까지 왔다는 뜻이다. 그러다 마지막 구간의 경사진 돌 언덕을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네 발로 기듯 오르다 보면 그 언덕 끝에서 갑자기 웅장한 피츠로이를 마주하게 된다. 오르는 언덕배기 위로 피츠로이 꼭대기가 삐져나오기 시작해 한 발 한 발 오르는 발걸음마다 점점 보이는 부분이 커진다. 마침내 피츠로이 봉 전체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호수 라구나 데 로스 뜨레스를 사이에 두고 피츠로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도착했다.


DSC00775.JPG 도착해서 처음 찍은 사진 (라구나 데 로스 뜨레스 + 피츠로이)


피츠로이는 세계 5대 미봉 중 하나이다. 사진으로 보아도 탄성이 나올 만큼 멋있지만 감히 사진은 실제를 10분의 1도 담아내지 못한다. 사진 기술과 촬영 기법이 워낙 발달해 유명한 여행지의 잘 찍힌 사진들은 실제 모습과 느낌을 꽤 잘 담고 있는 것 같다. 앞서 보고 왔던 남미 여행의 유명한 포인트인 마추픽추나 우유니도 '사진으로 본 느낌 그대로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츠로이는 사진으로 본 것과 달랐다. 아무리 잘 찍힌 사진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웅장함과 아우라가 오감으로 느껴졌다.


뭐랄까. 원근감이 이상하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호수 너머에 있는 저 눈 덮인 봉우리가 실제로는 아주 거대하고 꽤 멀 텐데 마치 성큼성큼 몇 걸음만 걸으면 금방 언저리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이 가깝게 느껴졌다. 아마 주변에 저 봉우리가 얼마나 큰 지 빗대어 견줄 만한 다른 사물이 없이 오로지 넓고 파란 하늘 밖에 없어서 그랬을 것도 같다. 날씨가 맑아 눈이 시리도록 시야가 깨끗했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제대로 된 방풍 재킷도 하나 없이 올라 찬 공기가 꽤 매서웠지만 가슴 탁 트이는 풍경이 너무 벅차고 황홀해서 내려오기가 싫었다. 오래도록 오들오들 떨며 앉아 있었다.


DSC00857.JPG 해가 완전히 올라오고 난 뒤. 날씨가 정말 좋았다!

쨍한 파란색을 뒤에 업고 하얗게 빛나는 피츠로이는 해가 점점 더 올라오면서, 구름이 몰려들었다 흩어졌다 하면서, 시시각각 다른 풍경을 보여주어 질릴 틈이 없었다. 그러나 영원히 머물 수는 없었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한밤 중에 출발해 깜깜했던 탓에 오르면서는 보지 못했던 산 길을 드디어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굽이 굽이 꺾인 길의 코너를 돌 때마다 일행 모두 탄성을 질러댔다. 올라오면서 상상했던 것 이상의 풍경들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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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 내내 눈은 호강했지만 발은 아니었다. 등산화가 아닌 일반 운동화로 20킬로미터를 걷는 것은 고역이었다. 특히 하산할 때는 발톱이 신발 앞쪽에 닿아 앞쪽은 앞쪽대로 아팠고 낮은 뒤축이 뒤꿈치에 닿아 뒤쪽은 뒤쪽대로 아팠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고통의 연속이었다. 돌이켜보면 피츠로이 트레킹은 20킬로로 길이는 꽤 길지만 난이도로 따지면 하에 가까운데 유독 힘들었던 건 다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무지해서 용감했다, 정말.


DSC00957.JPG 하산 완료. 다시 엘 찰텐 마을에 도착.

출발한 지 11시간 만에 엘 찰텐에 도착했다! 제대로 싸간 음식도 없이 허기진 상태에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숟가락 들 힘도 없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백패커스에 도착하자마자 남은 에너지를 겨우 겨우 짜내어서 씻고 트레킹을 함께 했던 친구들을 배웅하고 파워 낮잠을 잤다. 남들한텐 별 것 아니겠지만 평생 해보지 못한 경험을 했다. 평소 잠들기까지 엄청 뒤척이는 편인데, 평생 처음으로 '머리 닿자마자' 잠들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순식간에 암흑과도 같은 깊은 수면으로 빠져들어서 알람이 울려서 눈을 떴을 때 침대 천장을 바라보며 여기가 어디인지 떠올리는 데 한참 걸리는 그런 잠. 묘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피츠로이에 올랐던 것을 떠올리며 더 기분이 좋아졌다. 뿌듯하고 스스로 대견하고, 흐뭇하고, 행복했다. 만족감으로 마음이 빈틈없이 꽉 찬 그런 날이었다. 일찍 시작된 하루는 아직 겨우 오후 세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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