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찰텐, 파타고니아, 아르헨티나
열 시가 넘어도 해가 지지 않았다. 초저녁인데 왜 이렇게 벌써 피곤하지 싶어 시계를 보면 열 두시가 다 되어갔다. 공기가 좋아서인지 산을 오르내려서인지 매일 6인실 도미토리 벙크베드에서 5성급 호텔 못지않은 단잠을 잤다.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자연스레 눈이 떠질 때 일어나 창밖을 보면 안데스의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 피츠로이가 보였다.
호수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 봉우리를 마주했었지. 엘 찰텐 도착 첫 날 밤, 바로 피츠로이의 일출을 보러 야간 트레킹에 나섰다. 피츠로이 봉을 가장 근접해서 조망할 수 있는 호수 라구나 데 로스 뜨레스까지 오르는 왕복 20킬로의 코스였다. 야간 산행에 대비해 일부러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뒤척이는 시간만 길어졌다. 새벽 두 시, 추위에 대비해 있는 옷, 없는 옷을 다 껴 입고 롯지 로비에서 일행들을 만났다. 자연을 좋아하고 아빠 손에 이끌려 등산을 다닌 덕에 산행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베테랑은 아니었다. 등산화도 제대로 신어본 적이 없었고 그날도 나는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롯지를 나서니 밤 공기가 차고 바삭했다. 춥다기 보다는 상쾌함에 가까웠다. 달이 유난히 밝아 랜턴이 없다는 것이 조금은 덜 불안해졌다. 딴에는 단단히(?) 채비를 하였으나 등산화도 등산스틱도 랜턴도 없이 동네 산보하는 차림으로 등산로 입구로 향했다.
해는 피츠로이 봉 맞은 편에서 떠 올랐다. 붉은 해가 떠올라 피츠로이를 비추면 눈덮인 봉우리가 마치 붉게 타는 듯 보여 여행객들은 그 장면을 '불타는 고구마'라고 불렀다. 불타는 고구마를 보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그러나 부지런히 걷는다 해도 불타는 고구마를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고도가 높고 날씨가 변덕스러워 코 앞에서도 봉우리를 못 보고 내려오는 일이 허다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상쾌한 정도인 줄 알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추위에 손끝이 시려왔고 얼굴이 얼어 붙었다. 편도 10킬로의 등산로에는 1킬로마다 표지판이 있어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를 부지런히 알려주었다. 얼른 다음 표지판이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걷다보니 동기 부여가 되었다. 밤인데도 흰 구름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맑은 하늘이 좋은 신호인 것 같아 더욱 사기가 진작되었다.
스마트폰 플래쉬와 감에 의존해 길을 찾다보니 길을 잘못 들기도 했다. 어쩌다보니 등산로라고 하기엔 헤쳐 나가기 힘든 숲덤불 한 가운데 들어서게 되었다. 우리의 확신에 찬 발걸음을 믿고 따라 온 또 다른 무리의 여행자들과 함께 숲덤불 사이에서 새하얀 입김을 뿜으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 여행자는 앞으로 가게 될 아마존을 미리 맛보는 줄 알았다고 했다. 우리는 더 큰 무리를 이루어 같은 목표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깜깜해서 뭐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산길이었지만 여럿이 걸으니 든든했다.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하고 목표지점까지 마지막 구간만이 남아있었다. 피츠로이 트레킹은 10킬로나 되어 길이가 길 뿐이지 등산로 자체는 완만하여 난이도가 쉬운 편인데 마지막 구간은 달랐다. 목적지 직전에 가파르고 험한 돌산을 1.5킬로 정도 올라야 했다. 고도가 높은데다 갑작스레 체력소모가 커져서 그런지 어지럼증이 왔다. 동이 트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사방이 밝아지기 시작해 일출을 놓칠까봐 다들 속력을 냈다. 지금 쉬었다간 불타는 고구마를 놓칠 것 같았지만 도저히 계속 걸을 수가 없었다. 일출을 놓칠 게 뻔한데도 기다려 주겠다는 의리있는 일행을 겨우겨우 설득하여 앞세우고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 어지럼증이 가라 앉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