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코르유적군, 캄보디아
오래된 것들이 보고싶다.
그 엄청난 세월이 깃든 것들이 마치 동네 놀이터 벤치인 것 마냥 무심하게 턱- 걸터앉고 싶다.
앙코르 유적을 좋아하게 될 줄 정말 몰랐다. 몇 번의 실망 이후, 워낙 유적지 구경에는 큰 기대가 없는 나였다. 어느새 유적지보다는 이름 없는 골목을 누비고 다니거나 시장 구경을 하는 게 우선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달이나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앙코르와트 정도는 가주어야 할 것 같았고, 또다시 실망한다 하더라도 내게는 한 달이나 시간이 있으니 며칠 쯤 날려먹어도 크게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유적지 자체가 아니라 유적지를 둘러보는 방식이 별로였다. 입장권을 끊고 화살표로 표시된 정해진 경로로 한 바퀴 슥- 돌고나오는 방식. 그 와중에 만지지 말라는 것과 들어가지 말라는 곳은 잘 피해야 한다. 책이나 사진으로 보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가짜 구경 같았다. 평면이 입체가 되었을 뿐.
앙코르 유적군은 일단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 그런 일회성의 관람이 가능하지도 않다. 나는 씨엠립에 일주일을 머물면서 새벽에, 아침에, 한낮에, 또는 해질녘에, 마음에 드는 시간대에 동네 공원에 산책을 나서듯 앙코르 유적지에 수시로 들렀다. 정해진 '관람경로' 따위는 없다. 유적지라면 흔히 있는 표지판이나 설명도 (좀 심하다 싶게) 전무하다. 들어가지 말라는 곳도 그리 많지 않다. 거의 모든 곳을 걷고 오를 수 있으며 걸터 앉아 쉬어갈 수 있다.
앙코르와트를 처음 마주한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툭툭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 나를 내려놓았고 휴대폰 불빛으로 돌뿌리만 겨우 확인하며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일출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연못 한 켠에 나도 자리를 잡고 서서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천년 전의 모습 그대로 인공 조명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덕에, 이따금씩 들리는 카메라 셔터음만 없었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왔대도 믿을 만했을 것이다. 달도 없는 덕에 유난히 짙었던 밤하늘이 서서히 푸르게, 그리고 다시 붉게 물들어 갔고 그 빛을 등에 업고 앙코르와트는 윤곽선을 드러내었다. 마침내 해가 떠올라 사원 구석구석이 제 빛깔을 찾을 때까지 황홀경의 순간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앙코르 유적군에 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해가 뜨기 한참 전 어두울 때 처음 마주하기를 추천하고 싶다. 뜨는 해와 함께, 장막이 걷히듯, 박제된 천년의 시간이 한꺼번에 다가온다.
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거쳐갔을까. 오래된 것 주변에는 늘 묘한 기운이 있다. 각기 다른 시간에서 같은 공간을 공유했던 수많은 호흡과 손길과 발자취가 쌓이고 쌓이면, 어떻게든 공기를 바꾸어 놓는 것일까.
오래된 것들이 보고 싶다.
천년의 세월이 깃든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고작 서른 해의 인생을 논하던 그 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