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울산
우림이를 보고 부산으로 건너가 건형이를 만나려고 했는데 건형이가 친히 울산으로 와주었다. 건형이 또한 내가 호주에 있을 때 인연이 되었다. 건형이를 알게 된 것은 세컨 비자를 위한 농장 생활이 막 끝나고 도시로 돌아왔을 때다. 워킹홀리데이 1년 차였을 때는 아는 것도 없었고, 최대한 생활비를 줄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 닭장 같은 셰어하우스에서 지냈다. 2년 차에는 돈을 조금 쓰더라도 사람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여기저리 알아보다가 멜버른 외곽 푸츠크레이라는 지역에 독실을 구했다. 건형이는 그곳에서 만난 세 살 터울의 동생이다.
건형이와는 '패션'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축으로 해 빠르게 가까워졌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열어 보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 쉽지 않은 일임에도 건형이는 금방 내 삶 속에 스며들었다. 타국 살이는 고독함을 즐기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고독감을 선사했는데 건형이는 내가 그 고독감과 맞설 수 있는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혼자서는 귀찮아서, 혹은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했을 일들을 건형이와 꽤 많이 했다. 건형이가 아니었더라면 2년 차 워킹홀리데이도 무채색의 단조로운 삶으로 가득 찼을 것을 것이다. 그래서 건형이에게 참 많이 고마웠다. 그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전달할까 싶어 호주를 떠날 때 요리용 칼을 선물했다. 셰프였던 건형이에게 그보다 좋은 선물이 또 있었을까 싶었다. 칼이 꽤 비싸서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건형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그 마저도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내 딴에는 꽤 의미 있는 선물이었는데, 조리복을 벗고 칼을 내려놓은 지 벌써 수년이 흘렀으니 인생이 참 재미있다.
호주에 뿌리를 내리고 싶어 했던 건형이는 그 과정이 녹록지 않아 2020년에 결국 귀국했다. 호주에서 빙수 가게를 오픈했고, 설빙에서 좋은 제안을 받을 만큼 꽤 성황을 이루기도 했는데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건형이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마다하지 않는 건형이의 다음 행보가 궁금했다. 그렇게 2020년 건형이는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 사업에, 나는 학원 사업에 뛰어들었다. 서로 비슷한 시기에 사업을 시작하며 누가 먼저 월 천만 원의 수익을 올릴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건형이는 6개월 정도 걸릴 것 같다고 이야기했고, 나는 그 말을 반쯤은, 아니 그 이상을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건형이는 거짓말처럼 6개월도 안 되는 시간 안에 1억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월 천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1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그 규모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커져 올해에는 최소한 70억 정도의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고 하니 그 성장 속도가 가파르다. 건형이의 실행력을 보고 있으면 나 또한 많이 느끼고, 배운다. 이 친구의 삶이 궁금하다. 어디까지,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그렇게 벌어들인 재물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
건형이는 틈만 나면 다 접고 부산으로 내려와 같이 일하자며 나를 꼬드긴다. 당장은 아니지만 나 또한 건형이와 함께 팀을 이루어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의 바람이, 나의 바람이 어떻든 현재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뿐이다. 모든 결과물은 시간이 빗어낸다. 어떤 일이 생길지 다만 기다릴 뿐이다. 멋진 동생 건형이의 삶을 응원한다. 우리는 한 데 이어져 있어 그의 삶이 빛나면 나의 삶 또한 빛날 것이다.